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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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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창선의 손바닥에는 소 우(牛)자가 찍혀 있었다 한설야의 /1929년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우리의 노동으로 일떠세운 이 땅에/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우리는 쫓기고 쓰러지고 통곡하면서/온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박노해의 시 중에서- 박노해 시인만큼 우리 노동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유혹하는 공단의 불빛, 산업역군이라는 권력과 자본의 달콤한 말에 하루가 멀다 하고 강행하는 잔업과 철야, 잘도 도는 미싱에 벌집이 돼버린 손가락, 그러나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건 개 돼지만도 못한 처참한 생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다가 차가운 쪽방 한 켠에서 맞이하는 죽음…’얼굴없는..
쥐불놀이, 도박 그리고 불륜 이기영의 /1933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30,40대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나 쥐불놀이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설날 세뱃돈만큼이나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빈 깡통도 보름 뒤에 있을 쥐불놀이를 위해서였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마른 풀이나 종이로 밑불을 놓아 불씨를 만든 다음 마른 장작을 빼곡히 채운다. 꺼지지나 않을까 깡통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너른 들판 한가운데로 모인다. 어느 틈엔가 들판은 쥐불을 하나씩 들고 나온 동네 아이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누구의 신호랄 것도 없이 각자 크게 원을 그리며 쥐불을 돌리면 겨울 들녘은 온통 새빨갛게 불춤의 향연이 한판 벌어진다. 작가 이기영의 시선은 지금 이 쥐불놀이를 향하고 있다. 한데 난데없는 불빛이 그 산 밑으로 반짝이었다. 그것은 마치 땅 위로 ..
'민촌' 쥐는 쥐인 척 해야 제격이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기영의 『민촌』/「조선지광」50호(1925.12)/창비사 펴냄 "쥐는 쥐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제격에 들어맞는 법이다. 작자는 여실하게 부르조와 연애소설이나 쓰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비위에 맞는 강담소설이나 쓸 것이지 아예 이와 같은 무모한 경거망동의 만용은 부릴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념론자이기로 이만한 이해관계는 구별할 만한 두뇌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사람이 있다면 가슴을 쓸어내려도 될 듯 싶다. 그대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는 말이다. 쥐이면서 쥐가 아닌 양 행세한다는 이는 다름아닌 춘원 이광수이기 때문이다. 조국해방을 황국신민이 못된 아쉬움으로 토로했던 뼛 속까지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추..
'홍염' 그는 왜 사위를 죽여야만 했나 최서해의 /1927년 신경향파 문학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작가들이 기존의 관념적이고 퇴폐적이며 유미적인 문학 대신 현실에 바탕을 둔 문학 운동을 기치로 출발했다. 그러나 과도기적 문학 운동의 한계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사회 불평등과 억압 구조 등에 대한 사회구조적 관점보다는 현실 고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의 행동은 늘 돌출적이고 충동적이다. 계급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다보니 소설의 결론은 살인이나 방화, 자살 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최서해의 『홍염』은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들을 두루 갖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탈출기』에서는 주인공이 항일무장투쟁에 나..
'목매이는 여자' 그녀는 왜? [20세기 한국소설] 중 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백조」3호(1923.9)/창비사 펴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를 기억하는가? 이들은 어린 임금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역사는 그들을 사육신(사六臣)이라 부른다. 사육신과 함께 또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들은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관직을 거부하고 재야에 묻혀 살았다. 살아서 주군에 대한 충성을 다했으니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기억했고 또 어떻게 기억하든 그들은 멋진 남자였다. 12명의 멋진 남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가 ..
마약, 쾌락과 파멸의 경계에서 나는 육지에서 꽤 먼 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동네 어른들의 대화 중에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말이 있다. ‘누구누구는 아마 아편으로 죽었지?’ ‘해마다 면에서 나와 양귀비밭을 불지르곤 했는데, 그러면 뭘해. 내년이면 또 여기저기 새로 나는데…’ 얼핏얼핏 스치는 얘기들이었지만 아직껏 기억이 뚜렷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도 젊은 시절 아편을 복용하셨고 그게 이유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편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어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동네 어른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았다. 내가 태어난 섬은 일제 강점기 지주의 횡포에 대항해 농민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던 곳이다. 이 농민운동은 해방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일제의 보호아래 성장했던 지주들이 여전히 섬 대..
지형근, 그는 왜 노동자이기를 거부했을까? [20세기 한국소설] 중 나도향의 『지형근』/「조선문단」14~16호(1926. 3~5)/창비사 펴냄 "교직원 한 명 나와보질 않아요. 그래도 매일같이 자신의 사무실을 쓸고 닦아주시던 분들인데 그렇게 하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욱이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말이죠." 배우 김여진의 말이다. 그는 요즘 용업업체와의 계약기간 만료를 이유로 평생 일터에서쫓겨날 위기에 처한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홍익대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양대, 한국교원대 등 지성을 대표한다는 대학에서 해고의 칼바람이 북풍한설보다 더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겉으로는 용업업체와의 계약만료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학들의 의도는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바로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다. 대학 ..
고향에는 슬픈 신작로가 있었다 현진건의 /1926년 우리네 길은 꼬불꼬불 지루함이 없다. 굽이돌아 해가 드는 모퉁이에는 느티나무를 그늘삼은 큼직한 돌멩이가 있어 나그네의 쉼터가 되었다. 불쑥 튀어나온 어릴 적 벗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낯선 이와도 엷은 미소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런 길이 어느 날 논을 가로지른 아지랑이 너머로 끝이 가물가물한 지루한 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신작로’라 불렀다. 누구나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고향에는 신작로 하나쯤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신작로를 60,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생겨난 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신작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수탈한 식량을 원활하고 신속하게 운송하기 위해 우리네 꼬불꼬불했던 길을 쭉 잡아 늘어뜨린 길이 신작로였다. 신작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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