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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민촌' 쥐는 쥐인 척 해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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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기영의 『민촌』/「조선지광」50호(1925.12)/창비사 펴냄

"쥐는 쥐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제격에 들어맞는 법이다. 작자는 여실하게 부르조와 연애소설이나 쓰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비위에 맞는 강담소설이나 쓸 것이지 아예 이와 같은 무모한 경거망동의 만용은 부릴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념론자이기로 이만한 이해관계는 구별할 만한 두뇌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사람이 있다면 가슴을 쓸어내려도 될 듯 싶다. 그대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는 말이다. 쥐이면서 쥐가 아닌 양 행세한다는 이는 다름아닌 춘원 이광수이기 때문이다. 조국해방을 황국신민이 못된 아쉬움으로 토로했던 뼛 속까지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추앙받고 있는 춘원에게 이처럼 살 떨리는 독설을 쏟아낸 자가 누구란 말인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창립을 주도하고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손꼽히는 민촌 이기영이 그 주인공이다. 월북작가, 좌파작가라는 멍에 속에 최근에야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기영은 이광수가 [혁명가의 아내]라는 소설을 통해 사회주의를 희화화한 것에 격분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기영이 이광수를 비난한 정확한 근거를 모른다손 치더라도 황국신민이고자 했던 춘원을 상기한다면 이보다 통쾌하고 시원한 독설은 여태 들은 적이 없다.

 

식민지 조선민중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구조적 원인에 고민의 방점을 두었던 이기영에게 사회주의는 이상형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조선민중의 가난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고향』을 꼽기도 하지만 소설 『민촌』에서도 이기영이 당시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던 냉혹한 시선이 오롯이 담겨있다. 소설 민촌’, 이기영의 호 민촌’. 여태 호가 없었던 이기영에게 벽초 홍명희가 소설 『민촌』을 읽고 지어준 호가 민촌이란다.

 

소설 『민촌』의 이야기 구성은 단순하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죽지 않고 살기 위지주의 아들에게 팔려간 소작농 딸의 이야기이다. 눈물이나 질질 짜고 읽기에는 주인공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구조적 모순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 사뭇 비장해 보이는 소설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민촌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이른다.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은 늘 가난하다. 농사를 지어도 연명할 쌀이 없다. 작가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래 이 동리 사람들은 점점 더 못살게만 되는데 작년에 흉년을 만나서 더구나 못살 지경이 되었다. 그들 중에 조금 살기 낫다는 이가 남의 놈섬지기나 얻어 부치는 것인데..그렇지 않으면 모두 나무장사와 짚신장사와 산전을 파서 굶다 먹다 하는 이들뿐으로 올에는 또 물난리가 나서 수패를 당한 사람도 많다. -『민촌』 중에서-

 

이 소설에서는 세 명의 등장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 점순이와 서울댁 그리고 박주사 아들이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던 점순이는 당시 조선민중의 얼굴이자 우리네 모습 그대로다. 반면 모시 두루마기에 맥고모를 쓰고는 살이 너무 쪄서 아랫볼이 터덜터덜하고 늘 점젆은 걸음새로 돌아다니는 박주사 아들은 식민지 조선에 불어닥친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여기에 서울댁의 등장은 점순과 박주사 아들이 운명처럼 떠받들고 사는 민촌의 뒤틀린 구조를 자각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 이기영의 사상이 서울댁을 통해 투영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물난리에 거액을 빈민 구제에 기부했다는 서울 사는 민부자의 얘기를 들은 민촌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지게 놀랐다. 이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서울댁의 말이었다.

 

그것은 부자들의 사탕발림이다. 그리하여 더 짜먹으려는 수작이다. 이것이 모두 장사치의 잇속으로 따진, 사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서 저희의 부만 늘리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돈을 쓸 터이면 그것은 반드시 그만큼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쓸 일이지 결코 놀고먹는 놈이나 악한 짓을 하는 놈은 못 쓰도록, 그래 병신, 노인, 어린이들 외에는 모두 제각기 재간대로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옳은 일이다. ” -『민촌』 중에서-

 

서울댁의 일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은 돈만 아는 세상이다. 만일 개가 돈을 가졌다면 멍첨지라고 공대할 세상이야.” -『민촌』 중에서-

 

비록 민촌 사람들의 웃음통을 터뜨린 말이었지만 작가 이기영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 짧은 문장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민촌 사람들은 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는가?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이들에게 서울댁의 의식화(?) 교육은 민촌 사람들이 특히 지주의 첩으로 팔려가야 하는 운명을 예상하고 있는 점순에게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못 먹고 헐벗으며 게딱지만한 오막살이 속에서 모기 빈대 벼륙에게 뜯겨가며 이렇게 하루살기가 지겹도록 고생고생하게 된 것은 그게 모두 몇 놈의 악한 놈들이 돈을 모두 독차지해가지고 착하게 부지런히 일하는많은 사람들을 가난의 구렁으로 잡아 처넣은 까닭이다. …낮에는 햇빛 밑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달 아래서 하루의 피곤한 몸을 쉬는 천만 사람이 다같이 일해서 먹고사는 세상이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민촌』 중에서-

 

서울댁의 얘기를 그저 재미로 듣던 민촌 사람들은 보리양식이 떨어지는 칠월이 되고서야그 의미를 알게 된다. 남의 것 때먹은 적 없고, 어떻게든 갚을 마음을 먹고 있는데도 근처 양반부자들은 이들의 빈궁을 모른 체 했다. 점순은 비로소 가난은 전생의 죄얼이요 부귀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현실에 눈을 떠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실은 냉혹하다는 사실에 이 소설의 슬픔이 있다. 벼 두 섬에 박주사 아들에게 팔려가는 점순은 당시 조선민중의 현실이었다. 자각 이기영은 비극적 결론을 통해 오히려 그의 사상적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귀엽게 길러온 부모의 사랑도 동기간의 따뜻한 우애도 또한 인간의 행복아 어서 오너라 하고 동경하고 바라던 처녀의 꽃다운 희망도, 이 벼 두 섬 앞에는 아무 힘이 없이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촌』 중에서-

 

작가 이기영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는 소설 [두만강]이 그에게 이런 영예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영은 지금은 퇴물이 되어버린 사회주의를 신봉했고 그런 류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한국사회에서 잊혀지고 또 잊혀져야만 했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10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나면 또 다른 퇴물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는 세상에 말이다.

 

또 이기영도 사람이기에 일제 강점기 잠시나마 친일 문학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었지만 환멸을 느끼고 해방되는 날까지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서도 황국신문이 될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한탄한 이광수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에 비하면 변절의 생채기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에 한 명이 작가 이기영은 아닐런지

 

최근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아산과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기영의 문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의미있는 변화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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