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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4.07 헤라클레스와 에우리스테우스의 악연을 끝낸 영웅, 힐로스 1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의 장남 힐로스(Hyllus)는 그리스의 영웅이었다. 그는 오이칼리아의 공주 이올레와 결혼하여 클레오다이오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 헤라클레스가 죽은 후 힐로스와 형제들 즉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자식들)는 한때 헤라클레스를 괴롭히고 그를 노예로 삼았던 에우리스테우스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전투에서 에우리스테우스를 물리쳤다. 이 때 에우리스테우스를 죽인 헤라클레스의 아들이 바로 힐로스였다고 한다. 나중에 힐로스는 형제들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를 침략했지만 예언을 잘못 해석하여 침략은 좌절되고 힐로스는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힐로스는 도리아 그리스인들에게 특히 중요했다. 사실 도리아족의 세 부족 중 하나인 힐레이스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힐로스는 그리스 문학이나 예술에서 특별히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7년~406년.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의 <트라키스 여인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힐로스를 안고 있는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가 태어나기 직전 제우스는 곧 태어날 페르세우스의 후손이 미케나이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태어나기도 전부터 헤라클레스를 증오했던 헤라는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이아를 부추겨 헤라클레스의 출산을 늦추고 에우리스테우스의 출산을 앞당기게 했다. 결국 제우스가 말한 예언의 혜택은 헤라클레스가 아닌 그의 사촌 에우리스테우스가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에우리스테우스는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탓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허약한 상태로 평생을 헤라클레스에 대한 열등감과 증오로 살아가게 되었다. 에우리스테우스의 헤라클레스를 향한 증오는 헤라클레스가 죽어 신이 된 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힐로스를 비롯한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을 펠로폰네소스로 쫓아 버렸다.


힐로스는 형제들 즉 헤라클레이다이를 이끌고 트라키스 왕 케익스에게 가지만 케익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협박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힐로스는 형제들과 함께 헤라클레스와 친분이 있는 테세우스의 나라인 아테네로 갔고 이에 에우리스테우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에서 에우리스테우스는 추격을 피해 도망가다가 힐로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에우리스테우스가 죽은 후 힐로스는 헤라클레이다이를 이끌고 아버지 헤라클레스가 생전에 조국으로 생각했던 펠로폰네소스로 진격하여 그 곳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펠로폰네소스를 점령한 힐로스와 형제들은 1년 동안 머물렀다가 역병 때문에 물러났다. 그들은 테살리아로 물러났는데 그곳에서 라피다이족과의 전쟁에서 헤라클레스를 도왔던 도리아족의 신화적 조상인 아이기미우스가 힐로스를 입양하고 자신의 영토의 3분의 1을 그에게 주었다. 아이기미우스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인 팜필루스와 디마스는 힐로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했고 힐로스는 도리아인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이 세 영웅의 이름을 따서 도리아족 세 부족이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고자 했던 힐로스는 델포이 신탁을 찾았고 신탁은 그에게 세 번째 열매를 기다렸다가 바다로 가는 좁은 통로를 통해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3년 후 힐로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후계자인 아트레우스를 공격하기 위해 코린트 지협을 가로질러 행군했지만 테게아의 왕인 에케무스에게 일대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두 번째 시도는 그의 아들 클레오다이우스가 지휘한 세 번째 시도와 그의 손자 아리스토마쿠스가 지휘한 네 번째 시도로 이어졌지만 두 시도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아리스토마쿠스의 아들인 테메누스, 크레스폰테스, 아리스토데모스는 신탁에게 자신들의 지시가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세 번째 열매는 세 번째 세대, 좁은 통로는 코린트 지협이 아니라 리움 해협이라는 신탁의 해석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따라 나우팍투스에서 함대를 건조했지만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함대와 아리스토데모스가 번개를 맞았고 함대는 파괴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 중 한 명이 아카르나니아 예언자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테메누스가 다시 신탁에 묻자 속죄 제의를 바치고 살인자를 10년 동안 추방하고 안내자 역할을 할 세 개의 눈을 가진 남자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나우팍투스로 돌아가는 길에 테메누스는 말을 타고 있던 아이톨리아 사람 옥실루스와 마주쳤고(그래서 세 개의 눈이 생겼다) 즉시 그를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옥실루스가 탄 노새가 눈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테메누스는 배를 수리하고 나우팍투스에서 안티리움으로 항해한 다음 펠로폰네소스의 리움으로 갔다. 반도의 최고 통치자였던 오레스테스의 아들 티사메누스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죽었다. 이렇게 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헤라클레이다이는 제비뽑기로 영토를 분배했다. 아르고스는 테메누스에게, 라케다이몬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쌍둥이 아들인 프로클레스와 에우리스테네스에게, 메세네는 크레스폰테스에게 함락되었다. 엘리스의 비옥한 지역은 합의에 따라 옥실루스에게 예약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기원전 221년까지 라케다이몬을 통치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훨씬 일찍 사라졌다. 도리아인에 의한 펠로폰네소스 정복은 일반적으로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이라고 불리며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영웅 조상과 그의 아들들의 정당한 상속 재산을 회복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도리아인은 다른 그리스 부족의 관습에 따라 전설적인 영웅 중 한 명을 통치 가문의 조상으로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전통을 전적으로 신화적인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에톨리아인과 도리아인이 펠로폰네소스를 공동으로 침략한 것을 나타내며 후자는 테살리아인의 압력으로 원래 북쪽 고향에서 남쪽으로 쫓겨났다.

 

호메로스(Homer.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 서사시인)나 헤시오도스(Hesiod.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 서사시인)는 이 헤라클레이다이나 그들의 침략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년~425년.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지리학자)는 그들의 업적을 찬양한 시인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는 헤라클레스 죽음 직후의 사건으로 제한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그리스 비극작가들에 의해 증폭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지역 전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이 전설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의 통치자들에게 제공한 서비스를 찬양한 것으로 보인다. 헤라클레스가 데이아네이라에게 독살된 후 헤라클레스는 힐로스가 성인이 되면 이올레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힐로스와 이올레는 아들 클레오다이우스와 딸 에바이크메, 아리스타에크메, 힐리스를 두었다.

Posted by 여강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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