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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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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쏟아지는 날 다사히 볼이라도 부벼줄 한 모금의 볼따귀도 시간마다 가슴 아모려 기다려질 한 올의 바래움도 당장 육신채 마음채 내어던져 바치고 싶은 우러러볼 아무것도 없이 남의 집 뒷골방에 누워 다 사위어가는 냉화로를 뒤적이며 있노라면, 눈송이는 펑펑히 상흔을 두드리며 쏟아져오고 대지는 만 근같이 침묵하여 사람 소리조차 낯이 설었다 가는 곳마다 걸레쪽처럼 누데기가 된 생활은 낡은 횃대에 걸려 나부끼고, 세기말의 마지막 행렬은 안간힘 쓰며 눈물겨운 갈등을 저지르는 구슬픈 만가 소리 무엇이 무엇을 잡아먹고 무역이 백성을 팔아먹고 아가씨들이 사태를 이뤄 매음을 흉내내고······. 함박눈은 펄펄이 쏟아져오고 송이마다 피묻은 기억들이 되살아 매자근한 체온 위에 말없이 쌓여가도 발자욱 소리 하나 매혹스런 노랫가락 하나 들려오질 ..
말의 사기사님네께 한 천년 졸아나보시지요 일제히 고개들을 끄덕대며 무슨 싸롱이라든가에 들어앉아 별들이 왜 별입니까 그것은 땅덩이지요. 아 그 유명한 설계사 피카소씨라시죠 아니, 저, 뭣이냐 그 입체파 가수들이라시던가요 멋쟁이시던데요 새파란 제자들을 대장처럼 데리구 앉아. 농사나 지시면 한 백석직은. 품도 한창 아쉴 땐데. 염체 좋은 사람들 그래, 멀쩡한 정신들 가지구서 병신 노릇 하기가 그렇게나 장한가요 마음껏 흉물 쓰구 뒤나 자주 드나드시죠 양식은, 피땀 흘려 철마다 꼭 꼭 보내올릴께요 뽕먹는 누에처럼 그 괴상한 소리나 부지런히 뽑아서 봄에 자꾸 감아보세요 「어떻게 되나」 참 훌륭도 하시던데요 어쩌면 그렇게도 꼭 같을까 미국사람을 참 훌륭히도 닮으셨어 조끔만 더 있으면 우리말 같은 건······. 「원체 일등국언자는 양..
문자폭탄에 항의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추천합니다 어릴 적 살던 마을에는 공동우물이 몇 개 있었다. 나름 부유한 집은 개인 우물도 있긴 했다. 우물가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 긷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폴짝 뛰어 들여다 본 우물 안에는 온 우주가 다 들어 있었다. 하늘도 있고,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있었다. 나에게 소리라도 지르면 우물은 더 큰 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우물 속 나를 보고 웃어보기도 하고, 찡그려 보기도 했다. 바람이라도 지나가면 내가 웃고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목이 말라 두레박을 던지면 우물 밖 나와 우물 속 나는 같은 줄을 잡고 서로 당기는 듯 했다. 혼자 있는 우물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동네 우물마다 무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
문재인 대통령의 새로운 길 연일 파격이다. 불과 이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낯선 길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것도 새가 울고 꽃이 핀 봄햇살 가득한 길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치뤄진 장미 대선의 승자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동안 보아도 못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살아서일까 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봄날 새벽 공기처럼 신선하기 그지 없다. 격이 없이 시민들을 만날 때면 딱 이웃집 아저씨나 할아버지다. 부창부수일까 영부인은 '유쾌한 정숙씨'라는 별명처럼 근엄함 대신 친근함으로 시민들과 포옹을 마다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낡은 구두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함이 느껴지고 독도 강치가 그려진 넥타이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급기야 대통령을 쪼그려 앉아 기다리게 한 간 큰(?) 초딩까지 출연했다. 어..
윤동주의 '봄' 그리고 우리의 '봄' 저녁 출근길 촉촉이 젖은 길가에 흐드러진 벚꽃이 터널을 만들었다. 벚나무 허리 아래로는 개나리가 질세라 노란 빛깔을 연신 뿜어내고 있다. 저만치 목련은 이미 작별 인사를 할 모양인지 고개를 숙인다. 멋없는 자동차들은 벚꽃 터널을 무심하게 씽씽 내달리고 있다. 연신 하늘만 쳐다보며 걷다보니 목이 다 아프다. 이런 나를 노란 달이 벚꽃 사이로 빼꼼이 엿보며 웃고 있다. 아! 드디어 봄이 왔나 보다. 유난히 길었던 올 겨울도 끝내는 봄빛에 길을 내주고 마는구나.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자연의 봄은 왔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았을 뿐이다. 4년이 그랬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마음의 봄은 늘 잿빛 꽃으로 물들었다. 봄놀이 간 아이들은 겨울에 갇혔고 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4..
일제와 군사정권의 참혹했던 아동인권탄압 현장에... 어둠 속 섬에도 동트는 새벽이 있었으련만 아주 오랜 날 유폐된 섬 속에 소년들이 있어야만 했으니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정녕 역사일진대 삼가 오늘 무릎 꿇어 그대들 이름을 호명하나니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치 듯 어희 돌아들 가소서 이 비루한 역사를 용서하소서 -농부시인 홍일선의 시 '한 역사' 중에서- 민족연구소 회보 《민족사랑》7월호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현장 한 곳이 소개되었다. 1942년 5월. 일제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현 단원구 선감동으로 지금은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음)에 선감학원이라는 직영 감화원을 설치했다. 감화원은 8~18세의 부랑 소년들이나 불량 행위 우려가 있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 당시 이곳에서 생활하던 500여 명의 소년..
탐욕스런 인간이 서 있는 이곳, '슬픈치' 박서영의 시 '슬픈치, 슬픈' 통영 비진도에 설풍치(雪風峙)라는 해안언덕이 있다. 폭설과 비바람이 심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절벽이다. 그래서 설풍치는 슬픈치로 불리기도 한다. 그 해안을 누가 다녀갔다. 길게 흘러내린 절벽치마의 올이 풀려 도도새, 여행 비둘기, 거대한 후투티, 웃는 올빼미, 큰바다쇠오리, 쿠바 붉은 잉꼬, 빨간 뜸부기. 깃털이 날아가 찢어진 치마에 달라붙는다. 다시 밤은 애틋해진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을 열오놓은 채로, 달의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잠을 잔다. 희 눈이 쏟아진다. 커튼의 올이 풀려 코끼리새 화석의 뼈를 감싼다. 따뜻한가요? 눈사람이 끼고 있는 장갑의 올이 풀려 내 몸을 친친 감는다. 나는 달아나는 사람의 자세로 묶여 있다.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나 발견된 죽은 새를 안고 있..
안녕하지 못해 아슬아슬한 우리네 이야기 어쩜 이리도 희고 따스할까 눈처럼 세상을 응시하고 과거에서 흘러나온 꿈인 듯 커다랗게 부풀었구나 고구려나 신라 시대가 아니라서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지 않지만 알은 매끈매끈한 사람의 피부야 이 무서운 세상에 그 얇은 껍질은 위험해 모피알 정도는 돼야 안 다치지 알 속의 시간들이 흩어지지 않게 내가 살살 굴릴게 살림이 늘고, 아는 사람이 느는데, 내 안의 생은 동굴처럼 적막해 알이라도 굴리지 않으면 안돼 내가 볼 수 있는 동안만 알이겠지 내가 사는 동안만 굴릴 수 있겠어 온몸으로 쏟아지는 밤빛 속에서 깊은 밤 도시를 굴리며 나는 간다 -신현림 시인의 '알을 굴리며 간다' 중에서- 출처> 창작과 비평 2013년 겨울호 *신현림: 1961년 경기도 의왕 출생.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 ,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