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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지형근, 그는 왜 노동자이기를 거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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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나도향의 『지형근』/「조선문단」14~16호(1926. 3~5)/창비사 펴냄

"
교직원 한 명 나와보질 않아요. 그래도 매일같이 자신의 사무실을 쓸고 닦아주시던 분들인데 그렇게 하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욱이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말이죠."

 

배우 김여진의 말이다. 그는 요즘 용업업체와의 계약기간 만료를 이유로 평생 일터에서쫓겨날 위기에 처한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홍익대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양대, 한국교원대 등 지성을 대표한다는 대학에서 해고의 칼바람이 북풍한설보다 더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겉으로는 용업업체와의 계약만료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학들의 의도는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바로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다. 대학 내 청소노동자들 대부분은 고령으로 우리의 어머니요, 할머니들이다. 그들이 굳이 험난한 길을 선택한 데는 거창한 꿈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한 달 뼈빠지게 일해봐야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75만원이란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하는 우리의 노동현실이다.

 

이들의 아픈 현실에 눈물을 흘리는 배우 김여진의 개념충만도 감동스럽지만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아줌마 청소부, 할머니 청소부에서 노동자라는 어엿한 이름을 찾기 위해 권력과 자본의 매서운 칼바람 앞에 당당히 맞선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다. 이들의 투쟁을 보는 나는 부끄럽지만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여기 스스로 노동자임을 거부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아니 그는 노동자를 더할 수 없는 욕으로 받아들인다. 한 때 양반집안이었다는 환상과 허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나도향의 소설 『지형근』은 봉건적 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한 노동자의 몰락을 통해 새 시대를 맞이하는 지식인의 번뇌와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새 시대라 함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밀려오는 자본주의의 파도일 것이다. 나도향은 『벙어리 삼룡이』이나 『뽕』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설 『지형근』에서도 갈등의 소재로 남녀간 사랑을 선택하고 있다. 인간의 천박하고 원초적인 욕망을 보여주는 데 사랑만한 게 있을까 싶다. 또 이 작품이 1926년 「조선문단」에 연재되었다고 하니 나도향의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겠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물론 동시대 다른 작가들에 비해 뚜렷한 작가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지형근은 몰락한 양반 출신이다. 그가 괴나리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떠난 곳은 강원도 철원이다. 지금 강원도 철원에는 팔도 사람이 다 모여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작권을 강탈당한 소작농도 있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다. 철원에 수리조합이 생겼고 금강산전기철도가 놓였기 때문이다. 출신이야 어찌됐건 지형근은 노동자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이기를 거부한다. 비록 몰락했지만 그는 여전히 양반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방해하는 요소이자 또 하나의 몰락을 자초하는 계기가 된다.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그에게 위선과 헛된 욕망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봉건적 사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형근이 술집에서 만난 창기 이화, 그녀는 한 때 지형근과 한 동네에 살았다. 지형근으로서는 반갑기도 하려니와 이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마디로 아니꼽고 더럽다. 그는 창녀 이화를 마치 하늘에서 죄짓고 땅에서 먹구렁이 노릇을 하는 옛날의 삼 신선 중 하나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이화를 보기 위해 밤마다 술집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 지형근은 창기 이화와 사랑에 빠졌을까? 불행히도 그는 이화를 짝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화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한 번 품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로 이화를 가질 수 있다는 헛된 욕망일 뿐 사랑으로 보기에는 그의 현실 인식은 너무도 천박스럽다.

 

그는 결국 친구의 지갑을 훔치고 그 돈으로 이화를 만나기 위해 술집으로 가게 되고 이화와 어울리고 있는 면서기라는 자와 시비가 붙었다. 면서기의 노동자라는 말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나도향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형근의 인습 관념에 젖어있는 젊은 피는 끓었다. 그는 결코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다. 양반의 자식이요 행세하는 사람이다. 몸은 비록 흙 속에 파묻혔으나 마음과 기운은 살았다. 지형근의 헛된 욕망은 이화의 신고로 종말을 맞게 된다. 그는 절도죄로 경찰서에 갇히게 되고 다음날 신문기사에까지 나오게 된다.

 

작가 나도향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노동자 지형근만이 아니다. 당시의 열악한 노동현실 또한 허투루 보지 않았다.

 

우선 그가 있는 집이라는 것은 마치 짐승의 우릿간과 같은데 거기서 여러 십 명 사람들이 도야지들 모양으로 웅기웅기 모여 있었다. 땅을 파고 서까래를 버틴 후 그 위에 흙을 덮고 약간의 지푸라기로 덮어논 것이 그들의 집이다. 방 안에는 발에는 감발이며 다 떨어진 진흙 묻은 양말조각이 흐트러 있고 그 속은 마치 목욕탕에 들어간 것같이 숨이 막힐 듯한 냄새가 하나 가득 찼었다.” -『지형근』 중에서

 

나도향에게 지형근이라는 인물은 봉건적 잔재가 남겨놓은 허위의 대명사요, 급격하게 밀려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의 잘못된 이름이었다. 나도향은 지형근이 진정한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통해 모순덩이 세상에 당당히 나서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배우 김여진은 말한다.

 

"홍대 노동자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 그러니깐 관심이거든요. 이게 커지면 연대가 되는 것이죠. 저도 그냥 가서 어슬렁거리려고요."


*작가 박완서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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