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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4.3항쟁 진압군인이 폭로한 국가폭력의 비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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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의 <후일담>/1960

최근 KBS의 이승만과 백선엽 다큐, 이어진 일부 보수단체의 박정희 동상 건립이 마치 하나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일사분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은 KBS가 이승만과 백선엽 다큐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예상되는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독재자 이승만과 친일파 백선엽 미화와 찬양의 마지막 종착역이 바로 박정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승만 전대통령은 한국전쟁 전후로 자행된 수많은 양만학살에도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거대 보수신문의 케이블 종편(종합편성) 진출로 보혁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란은 더욱 점입가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영수의 소설 <후일담>도 이승만 정권 시절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영수의 소설로는 다소 의외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나 가치부여보다는 사건 진행과정에서 보이는 인간성 파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은 제주 4.3항쟁 당시 진압군대였던 X연대 박중위의 회상으로터 시작된다. 제목 그대로 <후일담>은 박중위가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러 갔을 당시에 있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한낱 돌조각이나 나무토막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박중위에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생생하게 눈앞에 다가서는 환상과 기억은 무엇일까? 고성능 폭탄에 몸뚱어리가 분해되는 장면을 불과 몇백 야드 앞에서 지켜보기도 했고 고지를 점령하고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시체를 유기체로서 수만 기록하고 한 구덩이에 그대로 묻어버리기도 했던 박중위가 그토록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은 도대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저자가 애써 강조하려고 했던 휴머니즘은 이런 표현들로 처음부터 극적으로 전개된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여순사건에 이어 제주 4.3항쟁 당시 진압군인으로 참여했던 박중위는 어느날 유령같은 행색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박중위가 묵고 있는 집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 여인은 여순사건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과 함께 빨치산에게 식량과 옷가지를 빼앗겼으나 이후에 경찰서로 끌려가 빨치산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한 끝에 4.3항쟁이 있던 날 집단학살의 피해자가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와 숨어지내고 있었다. 여인의 사연을 들은 박중위는 연대장에게 부탁해 이 여인의 양민증을 새로 발급해 준다. 
얼마 뒤 박중위는 새로 창설된 군기창으로 전속이 되어 제주도를 떠나게 되지만 5개월 후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박중위가 소속된 부대는 제주도로 소개 명령을 받는다. 박중위가 그 여인을 찾아갔지만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경찰은 빨치산 부역자나 귀순자, 반도의 가족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그 여인도 체포되어 몸에 돌을 매단 채 바다에 빠뜨려졌다는 것이다. 박중위가 엉뚱한 곳(?)으로 가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도 빨치산도 그렇다고 경찰이나 군인도 아니다. 그저 이 땅을 순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어떤 이념도 사상도 없다는 데 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도의 한 사람인 남편이나 아들이 이 보초망을 뚫고 나타났을 때, 그의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사실이 탄로됐을 때 군경은 이 가족을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이념도 사상도 아닌 또 하나의 비극이 있었다. -<후일담> 중에서-

아쉽게도 저자는 왜곡된 현실이나 국가폭력에 맞서거나 저항하려는 의지란 없다. 다만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지켜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만 관심이 있다. 또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성은 지켜져야한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국가의 편의에 의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이 때 국가폭력은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란 없다. 그저 국가의 편의에 의해서 폭력이 자행되고 미화되는 것이다. 이런 국가폭력은 비인간성을 초래한다. 부당한 국가폭력의 집행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하고 마당귀를 살피자, 이웃집 누가, 그날(여인이 끌려가던 날) 개가 죽자 하고 앙탈을 부리니까 순경이 그만 쏘아 죽였다고 한다. -<후일담> 중에서-

특히 마지막 부분의 여운 즉 박중위가 그 여인이 끌려가 죽었다는 바다로 간다는 게 사실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장면은 국가폭력의 비인간성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엉뚱한 곳? 그 곳은 바로 경찰서가 아닐까. 

박중위는 돌아섰다. 무슨 생각에 골똘하면서 부둣가로 간다는 것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엉뚱한 곳. 박중위는 온 전신의 피가 또 한번 머리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박중위는 한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망설이면서 이곳으로 가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무슨 사고를 내고야 말 것만 같았다. -<후일담> 중에서-

저자가 후일담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도 사건 자체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절치부심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당한 국가폭력으로부터 철저하게 파괴되어 여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인간성의 문제와 함께 독자로 하여금 사건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겠다. 

아직도 과거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들이 이념논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여 진상규명은 물론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저자가 <후일담>에서 보여준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의 한계는 역으로 양민학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한 방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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