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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두 여인의 서로 다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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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욱의 <개나리>/1948년

진영은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타다 마는 사진 위에 찢어서 놓는다.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다. 사진이 말끔히 타 버렸다. 노르스름한 연기가 차차 가늘어진다.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 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참나무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 내리고 있었다.
 '
그렇지. 내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참나무를 휘어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1957
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박경리의 소설 <불신시대>의 일부분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스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전쟁으로 미망인이 된 주인공이 힘겹게 아이를 키우지만 제목 그대로 현실은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한다. 그렇다고 주인공은 현실에 굴복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해방 후 혼란스런 현실을 배경으로 한 최인욱의 소설 <개나리>의 주인공 연이는 박경리의 소설 <불신시대>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고 비참한 지경으로까지 추락해 가는 자신의 처지에 어떠한 분노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할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못한다. 저자는 왜 굳이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그 궁금증은 개나리라는 제목을 통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그 궁금증을 풀기에 앞서 주인공 연이의 삶을 들여다보자.

소설을 읽는 내내 연이를 보는 마음은 답답하다. 아니 사실은 저자의 의도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수동적인 운명론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앞으로 펼쳐질 주인공의 삶이 얼마나 기구할지 어렵지않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저 팔자소관이거니 하고 모든 것을 타고난 운명에만 맡겨버리고 말자고는 하지만 이따금 지내온 스물두 해를 회상할 때나 또 앞일을 생각할 때 연이는 모두가 기막히고 암담한 것뿐이라 절로 한숨이 나곤 하였다. -<개나리> 중에서-

 

징용갔던 남편이 해방 후 유골이 되어 돌아왔을 때 연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악착같은 열정이 있었다. 유복자인 아들과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식칼은 남편이 떠나던 며칠 뒤부터 연이의 궤짝 속에 간직함이 되었다. 어느 놈이고 덤비기만 하면 이 식칼이 무서운 효력을 발생할 것으로 알고 연이는 누구보다도 이 한 자루의 식칼을 든든하게 믿어왔던 것이다. -<개나리> 중에서-

보다시피 연이의 다짐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종의 미신적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불신시대>에서 주인공 진영이 사진을 태움으로써 과거 쓰라린 추억에서 벗어나려 하는 장면과는 사뭇 비교된다. 결국 궤짝 위에 올려져 있던 유골상자가 삼베적삼 소매에 걸려 굴러떨어지는 것은 미신에 의존하고 있던 연이에게는 불길한 징조요, 연이를 더욱 소극적 인강형으로 이끌고 만다.

남편이 징용에 끌려가도, 가난한 친정살림과 올케의 눈치에 못이겨 재혼을 선택할 때도, 아들 복돌이를 남겨두고 한 사내의 트럭에 실려갈 때도 현실에 분노만 할뿐 그런 현실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자 최인욱은 왜 이런 수동적이고 운명론에 젖어있는 인간형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의문이 든다. 비슷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불신시대>의 박경리가 보여주었던 주체적 인간형과 <개나리>의 최인욱이 그려냈던 수동적 인간형은 상반된 표현방식에도 불구하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만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개나리>에서 보여준 연이의 태도는 저자 자신의 현실인식으로 볼 수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시민들은 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현실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그런 소시민들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소시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도 비판의식이 배제된 전개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연이가 재혼하던 날이 돌담 담장 너머로 개나리가 노오랗게 핀 어느 날이었다는 표현에서 힘든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민중들의 실낱같은 희망이 엿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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