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금지된 사랑으로 자유를 갈구하다

반응형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1960년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심지어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내마음을 알기나 할까. 어쩌면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22살이다. 나? 그의 작은 몸짓에도 가슴이 설레는 18살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18살 소녀와 22살 대학생의 풋풋한 러브 스토리다. 독자들은 벌써 눈치챈다. 굴곡없이 순탄하게 엮어가는 사랑 얘기는 눈꼽만큼의 매력도 없다는 것을. 러브 스토리는 쉬 이루어질 수 없을 때 그 가치는 빛을 발한다. <젊은 느티나무>도 그런 러브 스토리의 매력을 한가득 품고 있다. 아니 상상 이상의 파격이 있다. 설레발이 너무 지나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젊은 남녀의 러브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보자.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자의 또 다른 속내도 엿볼 수 있다면 좋겠다. 

강신재가 1960년 《사상계》에 발표한 <젊은 느티나무>는 앞서 언급했듯이 파격의 연속이다. 우선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허무주의적 소설에 빠져 있었지만 강신재는 과감히 애정 문제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니 크래커, 치즈, 테니스 등 서구적이고 도시적인 단어의 선택은 시대상황을 헛갈리게 만든다. 

한편 파격적인 젊은 남녀의 사랑은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행위다. 주인공 '나'와 '나'가 사랑하는 현규는 '나'의 오빠다. 오누이 사이란 말이다. 물론 이들은 피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법적으로는 엄연히 '나' 숙희와 현규는 법적인 남매지간이다. 결국 이들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면 그건 분명 법적인 근친상간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적 금기보다는 젊은 남녀의 순수한 사랑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 찰나에는 나는 그만 나의 자연스러운 위치-그의 누이동생이라는, 표면으로 보아 아무 스스럼도 불안정함도 없는 나의 위치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깨닫는다.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나 또한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학생인 현규는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어느날 어머니로부터 현규의 친구인 지수가 남기고 간 러브레터를 받았다. 뜻밖에도 집에 돌아온 현규는 지수의 러브레터를 보고는 나에게 화를 냈다. 현규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숙희는 부풀어오르는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날 숙희는 숲속에서 현규에게 안겨버리고 말았다.

 

현규와 단둘이 있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었다.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 이미 숲속에 가지 않는 것쯤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벅찬 일이 생기고야 만 것이다.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어머니가 일년쯤 미국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 므슈 리(불란서 영화에서 본 주인공인데 아버지와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도 현재 외국 여행중이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숙희는 서울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날이면 날마다 뒷산에 올라 젊은 느티나무 사이에 앉아있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숙희는 현규를 더 사랑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숲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을 수도 없고 이제 이 일을 부정하고는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그저 천박스럽고 불륜이라고 보기에는 이들의 사랑은 너무도 진실되고 아름답다. 그 이면에는 여성인 저자의 섬세하고 세련된 감정 묘사가 한 몫 하고 있다. 저자가 이들의 사랑이 확인된 배경으로 느티나무를 설정하는 데는 예로부터 느티나무가 갖고 있는 굳은 의지와 성장이라는 상징성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골마을 어귀마다 꼭 서 있던 또 많은 학교들의 교목으로서의 느티나무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젊은 느티나무>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젊은 느티나무>를 통해 당시 애정 풍속도의 전달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었을까? 저자가 굳이 이런 파격적인 설정을 한 데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4.19 혁명  직전으로 어느 때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높았던 시대적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금기에 대한 파격적인 설정은 자유에의 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