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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딸이 사랑한 남자는 종놈의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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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희의 <전말>/1954년

<등신불>과 <무녀도>의 저자 김동리가 첫째 부인이 자신의 문학세계를 이해해 주지 못해 방황하던 중 1948년 겨울 서울 명동의 '마돈나 다방(설마 요즘 다방과 같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터...)'에서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한 사람이 바로 손소희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어쩌면 천생연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손소희도 결혼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소설가 이호철이 한국일보에 연재한 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부산에서 따로 살림을 차린 김동리와 손소희 집에 김동리의 본부인이 기습해 당시 부산중앙일보의 특종기사가 되었다는데 가두판매 역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후에 정식 부부가 되지만 각각 두번째였던 이들의 결혼생활도 오래가지 못하고 김동리가 새 안식처를 찾아 떠나면서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때 연인이자 부인이었던 손소희는 김동리의 새출발에 아낌없는 축하를 해주었다고 한다.  


우연히 찾아낸 손소희와 김동리의 로맨스는 손소희의 소설 <전말>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아니 1940,50년대 보통 사람들로선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사랑을 했던 손소희로서는 변화해 가는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더 체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불륜으로 지탄받을 수 있는 그들의 사랑을 로맨스로 승화시킨 데는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봉건적 사고방식들을 과감히 청산하고자 했던 손소희의 열린사고가 한 몫 했을 것이다. 

풍자와 해학으로 조롱한 구시대적 신분의식

손소희의 <전말>은 중매쟁이 삼득에미가 송전무댁 딸을 김사장 아들과 맺어주기 위해 송전무댁 마님과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소설 말미에 딸의 등장은 깜짝 반전과 동시에 저자의 주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이 소설의 주제를 먼저 밝힌다면 결혼을 계기로 구시대적 신분의식을 비판하는 데 있다. 한편 저자의 이런 비판의식은 풍자와 해학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여전히 버리지 못한 신분적 권위주의를 신나게 조롱한다.

풍자와 해학을 동원한 주제의식은 단순히 구시대적 신분의식 뿐만은 아니다. 삼득에미로 대표되는 한건주의 또한 풍자의 대상이 된다.

물론 마님의 이야긴즉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요, 먼젓번에 이미 싫도록 들은 같은 이야기였으나 흡사 처음 하는 이야기 못지않게 마님이 열고(열이 나서 바삐 서두름)를 내면 수선을 떠는 데는 자신이 있는 삼득에미도 자못 놀랍고 지겹기까지 했다.

………………………

자칫하다간 일은 제대로 파탄이 되어 열 칸짜리 기와집은 고사하고, 현재 참새 눈물 폭이나 집세를 내고 있는 문간방까지 쫓겨나기가 십상이라고 정신을 바짝 모은 눈으로 색시의 눈을 마주 바라다보았을 뿐 대답을 삼가고 있었다. -<전말> 중에서-

한편 삼득에미는 송전무댁 마님의 철지난 신분의식을 풍자하고 비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마님의 얘기에 따르면 송전무댁의 역사는 우스개 소리로 사돈의 팔촌까지 더해 역사적 인물이란 인물은 죄다 이 댁 가족사의 일원이 되고만다. 이 때 일침을 가하는 삼득에미의 너스레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마님, 참 일제 때 벼슬이 뭐랬습죠. 예에, 시아버짐은 도에 경시나리구요, 친정아버님은 총독부에 과장나리였구먼요. 암요, 그 시절에 조선 사람이 그런 벼슬자리에 있었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지요. 훌륭하다 뿐입니까. 참 해방이 되니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합디다만 그때야 감투가 얻어걸리지 않아 못 썼지 갖다 씌워주면 누가 마다했겠습니까. 입은 삐뚤어져두 말은 바른대루 하란다구 안 그렇습니까. 마님." -<전말> 중에서-

삼득에미의 알랑방귀에 마님의 권위의식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자네두 중신을 허투루 하면 못쓰네. 그저 돈냥이나 있어서 으르르하게 집칸이나 꾸리구 살면 그만인 줄 아나, 사람이란 뿌리가 좋아야 하느이. 요즘 세상에 제아무리 으릉거리고 살아도 근본이 상것들이면 결국 별수 없는 거야. 아예 상것들하고는 상대를 말아야 해." -<전말> 중에서-  

딸이 사랑한 남자

한건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진 삼득에미의 오지랖은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서 말이고 못하면 뺨이 석 대라더니 삼득에미의 방 열칸짜리 집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소설에서는 놀라운 반전의 복선이 된다. 마님의 말에 마치 기계적으로 호응해주다 그만 자신이 사는 집 안채에 사는 노총각 선생의 얘기를 하고 만 것이다. 왜 이게 문제가 되었을까. 조금의 인내만 양보한다면 반전의 재미가 쏠쏠하다. 

삼득에미는 이 총각 선생이 어느 과년한 처녀하고 키스하던 광경을 목격한 것까지 오지랖 넓게 얘기하고 만다. 철저한 신분의식과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마님에게 이 젊은 연인의 사랑은 그저 '더러울' 뿐이다. 문제는 삼득에미가 하도 자세히 설명한 나머지 마님은 이 총각네 아비가 자신의 친정 어머니 계집종의 남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쯤에서 딸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눈치 챘을 것이다. 또 마님 딸과 종놈 아들인 총각 선생의 애인이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소설 <전말>은 결코 결혼을 둘러싼 세대간 갈등이 아니다. 구시대적 신분의식에 대한 풍자요 비판이다. 딸이 등장은 자칫 세대간 갈등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구시대적 신분의식의 일방적인 패배로 귀결시키고 만다. 해학적 요소를 차용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딸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일방적인 주장과 마님이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설정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의 패배를 알리는 상징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하하하. 어머닌 지금이 몇 세긴 줄이나 아세요?"
"뭐가 어쨌다구 아단이예요. 전 아직 그이만치 훌륭한 사람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바보 온달이 이얘긴 잘만 하시대요. 뭐 어디 대통령두 양반이래야만 되나."
-<전말> 중에서 -

마님의 구시대적 신분의식의 패배는 삼득에미의 한건주의, 한탕주의의 좌절로 이어지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의 해학적 요소와 함께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저자 손소희의 남성같은 굵직굵직한 필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사회에서 깨뜨려야 할 시대착오적인 봉건성과 신분의식, 차별의식은 단지 연애와 결혼에만 국한된 악습은 아니다. 새 세기가 시작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에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습들이 연명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잠깐의 짬을 내어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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