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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쉰넷 사내와 열세살 소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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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웅의 <항구>/1940년

쉰네 살 곽서방과 열세 살 장손이는 늘 붙어다닌다. 빈대떡과 시루떡 안주가 있는 대포집도 서슴없이 드나드는 사이다. 얼추 따져봐도 할아버지와 손자, 적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쯤으로 생각하겠지만 곽서방과 장손이는 움집들이 아기자기 들어박힌 대동강 하구 남포 빈민굴에서 아래 윗집 사는 이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곽서방에게 장손이는 아들없는 손자와 마찬가지고 장손이에게 곽서방은 아버지없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서로에게 각별한 존재다.

최태웅의 소설<항구>는 쉰넷 곽서방과 열세 살 장손이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동행은 여행의 한 지점이 아니라 일생을 함께 할 꿈이자 희망이다. 세대와 혈연을 초월한 이들의 동행에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희망이라는 이름

곽서방과 장손이는 1930~1940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쉰을 훌쩍 넘긴 곽서방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빠듯하고 반신불구인 몹쓸 신체 탓에 아내는 대놓고 화냥짓을 한다. 이런 곽서방이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과분한 사치이자 허세일 수도 있다. 한편 그것이 없으면 단 하루라도 제대로 버티고 서지 못할 것처럼 곽서방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다.

장손이는 어떤가. 요즘으로 치면 아동학대 논란이 불보듯 뻔하다. 열세 살의 나이지만 대장간에서 일을 한다. 소설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소년 가장이 아닌가싶다. 이들 두사람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은 희망의 끈을 잡으려는 간절함의 소산인 것이다. 저자는 비록 비루한 삶이지만 한 세상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져갈 소시민들에게도 어딘가에는 희망이 있다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를 담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 지게는 곽서방의 동반자이자 운명이었다.   사진>문화저널 21

그때마다 곽서방은 아들 죽은 손자처럼 장손이가 타근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진다. 장손이에게는 또한 아버지 없는 할아버지처럼 곽서방이 좋다. 해질 무렵 항구엔 바람이 한껏 쓸쓸하게 거칠게 속 쓰리게 불어와도 인제 상관이 없다. -<항구> 중에서-

곽서방의 희망찾기에서 장손이 말고 또 하나 중요한 소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게다. 부두노동자인 곽서방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변화해 가는 세상을 쫓아가지 못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곽서방과 장손이를 이어주는 매개물이자 곽서방이 남긴 희망의 구체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대물림되는 것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곽서방과 장손이에게는 희미하나마 오로지 희망의 불빛만 비추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항구는 곽서방과 장손이의 삶의 터전이자 현장이다. 또한 하늘 밑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아련한 향수에 젖기도 하지만 망망대해 펼쳐진 미지의 세상은 알수없는 꿈의 상징이다. 게다가 살가운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없다. 별볼일 없는 소시민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로 장손이를 등장시키는 저자의 의도를 조금만 비틀어보면 소시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고발이 되기도 한다.

코빼기가 시큰하고 가슴이 멍청하거나 말거나 장손이의 성난 것같은 눈과 뇌리에는 열다섯 살 된 자기가 꽤도 장성했고 곽서방의 굉장히 크고 무거운 그 지게가 자기에게는 마고자보다도 더 가든하고 깡총하게 업혀 있는 것이 보여진다. -<항구> 중에서-

곽서방이 죽으면서 장손이에게 지게를 남겨준다는 설정은 가장 소중한 물건을 물려주고 물려받는다는 점에서 둘의 각별한 관계와 곽서방의 부활이라는 희망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장손이도 대장간 일을 그만두고 부두의 지게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편이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소시민들의 절망적인 삶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 아니었을까. 쉰넷 사내와 열세 살 소년의 아름다운 동행이 슬픈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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