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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양심을 헌신짝 버리듯하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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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련의 <도정>/1946년

#
풍경1.

 

텐노오 헤이까(천황 폐하)가 고오상(항복)을 했어요.”

……?”

기쁘잖어요?”

? . 기쁘지!…기쁘잖구!”

……

너두 기쁘냐?”

그러믄요.”

그럼 웨 울었어?”

징 와가 신민또 토모니(짐은 우리 신민과 함게) 하는데 그만 눈물이 나서 울었어요.……텐노오 헤이까가 참 불쌍해요.”

텐노오 헤이까는 우리나라를 뺏어갔고, 약한 민족을 사십 년 동안이나 괴롭혔는데, 불쌍허긴 뭐가 불쌍허지?”

그래도 고오상(항복)을 허니까 불쌍해요.”

……

……목소리가 아주 가엾어요.”

 

#풍경2.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이던 1979년10월 어느날의 기억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오지의 섬, 뭍에서 뱃길로 2~3간을 달리면 중국 촌락의 아침밥 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던 섬 중의 끝섬. 신비스러울 법도 한 그 섬에 노란 밧데리통에 의지해 동네에 단 하나뿐인 TV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그날 TV를 보며 마당 한가운데서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심지어 소복을 차려입고 나온 어른들도 있었다. 분명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을 터인데…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볼 것도 없이 마냥 신기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그날 우리 동네엔 상을 당한 집도 없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쓰러지던 날 아무것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이유없이 울컥했던 나는 나이를 먹어서야 그날 동네 어른들이 통곡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풍경1은 지하련의 소설 <도정>에서 일왕이 항복선언을 하던 날 주인공 석재와 5살 소년의 대화이고 #풍경2는 내각 꼬깃꼬깃 기억하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 우리동네 표정이다. 소설 <도정>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년의 눈물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소년의 눈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서거에 임하는 동네 어른들의 통곡을  생각하면 의외의 쉬운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던 날 일왕의 항복선언을 듣고 광복이 아닌 일왕을 향해 눈물을 흘린 '소년'이나 영원할 것 같던 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아닌 아닌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하던 '동네 어른들'은 '소시민'이라는 계급으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시민'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소시민'은 정치적 함의다. 

'소시민'의 사전적 의미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간에 위치한 말 그대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총칭이다. 소상인이나, 봉급생활자, 소기업 사장 등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계층을 말한다. 한편 '소시민'은 늘 상승욕구를 가지고 있다. 계층적으로 볼때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 모두 '소시민'군에 속하지만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융합이 쉽지 않은 것도 상승욕구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소시민'은 늘 양지를 쫓는 인간 군상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소시민은 기회주의와 상통한다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위에서 언급한 소년이나 동네 어른들은 '소시민'이라는 표현보다는 '소시민적 군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소년과 동네 어른들을 왜 '소시민적 군상'의 상징처럼 얘기했을까. 이들은 너무도 순수해서 '미운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쁘게 표현하면 오랜 기간 동안 권력에 길들여져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저자가 고뇌하는 석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도 소시민적 안이함과 나태함에서 벗어나 양심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성찰하는 지식인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기회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현실도 이런 사람들에게 늘 승자의 자리를 내줄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석재는 일제의 사상 탄압에 못이겨 전향한 것을 두고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을 하지만 해방 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기철의 부류들이었다.

문득 기철이 눈앞에 나타난다. 장대한 체구에 패기만만한 얼굴이다. 돈이 제일일 땐 돈을 모으려 정열을 쏟고, 권력이 제일일 땐 권력을 잡으려 수단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다. 어느 사회에 던져두어도 이런 사람이 불행할 리는 없다. -<도정> 중에서-

소위 그 '양심'이란 어금길(언저리)에서 제 깐엔 스스로 고민하는 척 몸짓하며 살아온 석재와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너무도 냉정하고 냉혹하다. 석재는 공산당 입당 원서에도 자신의 계급을 '소(小)부르조아'라고 적는다. '소시민'과 같은 의미로 양심에 충실하려는 석재의 의지가 담긴 말이다. 석재는 자신과 같은사람들에 대해서 주저없이 '바보'라고 부르지만 끝내 양심을, 소신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소시민과 싸우자! 싸움이 끝나는 날 나는 죽고, 나는 다시 탄생할 것이다……나는 지금 영등포로 간다. 그렇다! 나의 묘지가 이곳이라면 나의 고향도 이곳이 될 것이다……' -<도정> 중에서-

어느날 화려한 옷으로 변신하고 나타나서는 일말의 부끄럼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뒤집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에서 석재의 자신을 둘러싼 소시민적 생각과의 투쟁은 일면 외로운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목 '도정'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소시민적 사고' 즉 기회주의적 사고는 도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겠다. 그래서 부제가 '소시민'이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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