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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사랑의 복수로 결혼한 어느 신여성의 주부생활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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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인의 <후처기>/1940년

신식교육을 받은 여자, 서양식 차림새를 한 여자. 개화기 당시 소위 ‘Modern Girl’이라 부르던 신여성의 출현은 봉건적인 가부장적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신여성은 외모의 파격만이 아닌 새 사고의 바람이 동반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임옥인의 <후처기>는 비록 세 번째 부인이긴 했지만 당당한 여성으로 또는 아내로, 어머니로 거듭나기 위한 신여성의 악전고투가 섬세한 심리묘사로 잘 표현되어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랑관과 결혼관을 엿들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전개는 ‘나’의 내면의식을 확인하는 순간 당시 신여성이 가졌던 한계를 보게 된다. 당당한 신여성 노처녀의 도전은 신여성이 주는 사회적 의미와는 달리 가부장적 사회라는 보수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

 

소설 <후처기> 1인칭 시점으로 전문학교를 나온 여학교 교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러나 서른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신여성 의 주부생활 적응기가 탁월한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신여성 에게 사랑과 결혼은 자존심의 문제다. ‘를 버리고 떠나버린 젊은 의사에 대한 복수로 후처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하며 의사 남편을 고집한 점이나 결혼 조건으로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렇다. 신여성의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선인 동시에 근대화와 함께 유입된 물질만능의 세태를 풍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저자는 가 전처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 및 주부로서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복잡한 사건보다는 의 심리상태의 변화에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서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런 의 심리와 선택들은 오로지 신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지키려는 자존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속으로 이 여자가 꽤 강한 내 적인 것을 직감해 버렸다.

 

치마 같은 것을 뜯어서 아이들 이부자리도 하고 방석 같은 것도 만들었다. 나는 전 사람의 그림자를 쫓되 내가 소비해서 없애려는 심산이다.

 

그리고 내 속에 움직이는 내 유일한 고것은 나서, 커서, 저애들보다는 몇 배나 더 잘할것만 같았다.

-<후처기> 중에서-

 

남편과 죽은 전 아내와의 러브 스토리를 얘기해 준 친구 덕순이와 절교하는 장면에서는 사랑보다는 배경을 선택한 주인공 의 냉혹함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당한 신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후처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에 대한 열등의식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여성 vs 페미니스트

 

그렇다면 신여성인 주인공 ‘나’는 오늘날 페미니스트(feminist)로 볼 수 있을까? 신여성이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고 출현한 새시대의 조류라는 점에서 개화기판 페미니스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여성의 원조격이 되는 당시 서구사회조차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가정내에서의 역할 등에서 남녀평등 개념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신여성을 오늘의 페미니스트와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소설 <후처기>에 그려진 신여성은 현대의 페미니즘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캐릭터다.

'후처'라는 표현에서 이미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가 진하게 묻어난다. 
 

결혼의 조건으로 사랑보다는 물질이나 배경을 선택한 점이나 후처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오로지 주부로서의 역할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점 등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시하는 오늘의 페미니즘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이 차를 내리는 시각부터 당당한 의사 부인으로, 더군다나 수십만 재산가의 부인으로 행세를 할 것이요, S읍 부인들 위에 서는 인텔리 주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기쁨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었지만 투쟁심 때문에는 충분히 즐거울 수가 있었다. -<후처기> 중에서-

 

말 그대로 <후처기>는 어느 신여성 노처녀의 주부생활백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후처기>는 그 동안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제한적이나마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재혼의 문제, 계모의 역할에 대한 발상의 전환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아쉽게도 여성의 사회적 또는 가정내 지위나 역할을 두고 그 사회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평가하곤 한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여성은 늘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신여성이 개화기 당시를 풍미했던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고유명사이긴 하지만 여성이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 되는 시대나 사회에서는 보통명사로서의 신여성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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