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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고향을 버려야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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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의 <탈향>/1955년

작가 이호철은 원산이 고향인 실향민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으로 동원되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단신으로 월남해 부산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부산항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시대> 배경이 된 밀다원 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호철의 데뷔작 <탈향>은 당시 부산항 부두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이호철의 단편소설 <탈향>은 전쟁의 충격으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로 점철된 당시 전후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는 실향민으로서 낯선 타향에서 홀로 서야만 했던 저자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마지막 안식처로서 고향은 삶을 꾸려나가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최종 목표가 되기도 한다. 한편 고향은 단어가 주는 감상적 의미로 낯선 곳에서의 정착을 쉽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고향을 떠나게 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소설 <탈향>은 고향이 주는 이런 의미를 극복하고 한다. 이는 '탈향'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쓰이는 '실향'이라는 단어와 얼핏 비슷해 보이나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입해 보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실향'이 수동적 개념이라면 '탈향'은 고향의 감상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능동적인 의미가 된다. 

 

                   ▲ 소설 <탈향>의 배경이 된 부산의 1950년대 모습.    사진>뉴시스

4→3→2→1

소설 <탈향>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와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북쪽의 같은 동네 네 친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들 네 친구는 마치 도원결의처럼 언젠가 북쪽 고향에 같이 돌아가기를 꿈꾼다. 낯선 땅에서 생할하는 이들에게 고향은 서로를 강한 연대감으로 묶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들 앞에 놓여진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돌아갈 기약도 없고 낯선 땅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립하기 위해서는 고향의 감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쉽사리 고향으로 못 돌아갈 바에는, 늘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달리 변통을 취해야겠다. 두찬이와 광석이는 나머지 셋 때문에 괜히 얽매여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자연 우리 사이는 차츰 데면데면해지고,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끔 했다. -<탈향> 중에서-

이들에게 친구는 다름아닌 고향이다. 비루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아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소설의 전개가 네 친구에서 주인공 '나' 한 명으로 줄어드는 과정은 고향의 감상을 하나씩 극복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광석의 죽음과 이로 인한 죄책감으로 어느날 사라진 두찬, 급기야 '나'는 마음 속에서 마지막 남은 친구 하원이마저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고향은 비루한 삶을 끊기 위한 극복대상이어만 했을까.

고향, 또 하나의 삶의 원천

소설은 처음과 마지막에 울보 하원이가 습관적으로 지껄이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이 새끼 술도 안 먹구 취핸. 참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눈두. 이북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광석이 아제비네 움물 말이다. 야하, 굉장헌데. 새벽엔 까치가 울구, 그 상나무 있잖니……야하, 눈 보구 싶다, 눈이." -<탈향> 중에서-

고향은 잊으려 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대상이 아니다. 애써 잊으려 할수록 고향에 대한 애잔함은 더 크게 가슴에 박히게 된다. 내가 하원이를 버리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나를 둘러싼 고향의 이미지는 '아, 어머니!'를 되뇌이면서 또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하원이의 희망을 들으면서 오히려 가슴에 더 크게 각인되고 만다.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고향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또 다른 나의 버팀목이자 원천임을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고향은 '실향의 아픔'이자 서로 다른 체제에 대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결국 그에게 고향은 극복대상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갈구해야 할 자신의 분신이기도 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실향과 탈향의 아픔을 동시에 겪고 있는 사람들이 비단 전쟁 피난민들만은 아니다. 산업화와 현대화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왔다. 누구나 생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고향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않다. 경제발전의 역군이라는 찬사를 들으면서도 결코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사회와 국가는 이들에게 영원한 주변인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소시민들에게도 고향은 소설에서처럼 극복대상이자 삶의 원천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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