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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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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의 <어둠의 혼>/1973년

"아부지, 이 지구가 생기나고 맨 처음, 달걀이 먼저 나왔게요, 닭이 먼저 나왔거예?"
"답은 간단하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답은 말이야. 아무도 몰라."
"피, 그런 답이 어딨습니껴. 지도 그런 답은 할 수 있습니더." -<어둠의 혼> 중에서-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품어봤음직한 문제이자 결론없는 주장만 되풀이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정말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과학적인 의미에서는 생물학이나 진화론 등이 동원되어 닭과 달걀의 선행 논쟁을 해결하려 들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사색의 깊이를 더해주는 주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창조론자들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지적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닭이 먼저일 수도 있고 달걀이 먼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관점에서 닭과 달걀의 선행논쟁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김원일의 소설 <어둠의 혼>은 닭과 달걀의 선행논쟁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주인공 나의 호기심에 '아무도 모른다'는 답을 내놓은 아버지, 아직 어린 '나'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행적, 닭과 달걀의 선행논쟁은 이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말이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산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 동족상잔의 비극이 꿈틀거리고 있던 그 때. 주인공 '나'의 가족은 각자 생존투쟁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궁핍한 생활을 꾸러나가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고 '나'는 하루하루 배고픔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 좀 모자라게 태어난 누나는 그 삶 자체가 투쟁이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커녕 늘 순경에게 쫓겨다닌다. 어쩌다 집에 오더라도 순경의 눈을 피해 밤에 왔다가는 훌쩍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빨갱이라 부른다. '나'는 빨갱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모른다. 다만 가족은 내팽개치고 도망만 다니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왜 아버지는 그토록 그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요 꼬마 놈은 날마다 높이뛰기 연습을 한단 말이야. 죽는 날까지 날마다 높이뛰기를 하지. 왜 그런 연습을 해요? 그런 아버지도 몰라, 청개구리만 알겠지. -<어둠의 혼> 중에서-

그런 아버지가 죽었다. 아니 순경들에게 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모부님은 나에게 아버지의 시체를 확인시켜 주었다. 아버지 가슴은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한다던 보라색으로 변했고 두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이모부님은 왜 '나'에게 아버지 시체를 보여주었을까. 가난한 집을 돌보지도 않고 도망만 다니다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아무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나이가 될 즘 '나'는 아버지의 유산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다르다'와 '틀리다'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그 사람들 모두는 각자의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 생각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또 각자의 신념 때문에 청개구리처럼 날마다 하늘에 닿을 때까지 뛰고 또 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틀렸다'고 윽박지르고 때로는 신체적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원칙처럼 떠들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하나의 생각만을 강요하고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틀렸다'고 단정지어 버린다. 다수는 권력이 되고 소수는 끊임없는 다수의 횡포에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틀린 사람이 되고만다.

<어둠의 혼>에서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다. '재작년 겨울에 무슨 법이 만들어지고부터 아버지는 갑자기 집에서는 물론, 읍내에서 사라졌다.'는 표현에서 지금껏 존폐 논쟁이 일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닭과 달걀의 선행논쟁에 대한 '모른다'는 대답은 세상 일을 옳다와 틀리다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매달리며 어떤 일에는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신념이 다를지언정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처럼 너도 쉬지 않고 자라거라. 다음에 크면 어떤 길이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인지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어둠의 혼> 중에서-

이모부님이 '나'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시켜주었던 것도 세상 사람들이 '빨갱이'라며 틀렸다는 아버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 신념에 따라 온전히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음일 것이다. 세상은 서로 틀린 생각들이 뒤엉킨 반목과 대립의 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소통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여정의 한 지점이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열린 사회라는 말도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의미일 것이다. 

닭이 먼저니 달걀이 먼저니 하는 논쟁의 결론은 무의미하다. 세상은 닭이 먼저라는 사람도 달걀이 먼저라는 사람도 공존하고 공생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어울렁더울렁 부대끼고 사는 것 뿐이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그것을 거부하며 살려는 사람들 때문은 아닐까?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정신은 가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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