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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전쟁이 남긴 가족의 상처 그리고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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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의 <월행>/1977년

전세계에서 한국처럼 전쟁의 잔혹성과 후유증이 국민들 개개인의 사생활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는 곳은 드물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국토는 허리를 잘리게 되었고 단일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가족의 이별, 그리고 전쟁. 형제끼리 총칼을 겨눠야만 했던 야만성과 고착화된 분단상황에 냉전적 이데올로기가 더해지면서 지금까지도 전쟁과 이념대립의 트라우마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화합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와는 별개로 움직이는 사회. 바로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벌써 분단 1세대들은 세월의 무게에 쓰러져가고 있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남과 북의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날선 대립각만을 고집하고 있다. 어렵사리 조성한 화해 분위기는 다시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고 있고 그 끝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가족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아니 가족의 해체를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사람을 뛰어넘을 수는 없거늘 한국사회만은 정반대로 시대를 거슬러 오르고 있다.

송기원의 소설 <월행>은 전쟁으로 해체된 어느 집안의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이념 전쟁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버린 이 가족의 얘기는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던 가족의 해후를 통해 화해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는 과정은 질곡많은 한국사회의 과거가 현재와 화해하는 과정이고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현대단편소설의 진수를 맛보다

송기원의 <월행>은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과 함께 한국 현대단편소설의 정수로 꼽힌다. 단 몇 번의 호흡만으로도 정독이 가능할만큼 짧은 소설이지만 밀려오는 감동은 여느 대하소설 못지않다. 절제된 표현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가족사를 빛바랜 영사기가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게 한다. 헤어짐과 만남 사이에 존재했던 시간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역사에 대한 작은 지식과 상상력만 있다면 어떤 독자건 채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월행>은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표현들이 눈에 띈다.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 살얼음이 낀 개천은 달빛을 받아 무슨 시체처럼 차갑게 반짝거리며 나무숲으로 사행의 긴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월행> 중에서-

이런 표현들은 오히려 소설이 풍기는 슬픔을 완화시켜주기는커녕 슬픔을 더 처연하게 만들고 있다. 또 서사적 전개보다는 등장인물간 대화 위주로 끌어나가면서 화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상봉과 속죄의식 그리고 치유

주인공 사내가 고향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에서부터 자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속죄의식이 진행되기까지 이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바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구름 사이를 움직이고 있는 달이다. 달빛은 그동안 자신의 과오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숨어살아야만 했던 주인공 사내를 양지로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가족사 더 나아가 역사의 증인이라도 볼 수 있다. 또한 차가운 달빛은 사내의 속죄의식과 치유과정에 진정성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주인공 사내가 전쟁을 겪으면서 가족과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지극히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도 사내의 말을 통해서.

"니 애비가 총살당하던 날 밤에 난 저쪽 골에 숨어 있었제. 물론 확성기로 떠드는 소리도 듣고 있었제. 자술 허면 니 애빌 살려준다고 말여. 그래도 난 못 나갔던 겨. 결코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녔어. 그 당시 나넌 눈깔이 뒤집혀 있었을께. 복수를 하겄다고 말여. 허허." -<월행> 중에서-

전쟁 중에 이 가족에 얽힌 특정 사건이 아닌 전쟁의 일반성, 즉 잔혹하고 야만적인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저자의 의도는 아닐까. 사내는 아버지를 따라 어느 골짜기에 누워있는 봉분들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속죄의식이 거행된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사내를 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폐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않은 사내에게 떠날 것을 요구한다. 속죄의식만으로 소설은 끝이 났냐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사내의 예닐곱살 된 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작지만 과거와의 화해와 남겨진 상처의 치유를 시도한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는 결국 가족의 해체와 파괴를 의미한다. 이제는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의 상처를 오롯이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분단이라는 또 다른 전쟁으로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현실을 바꾸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만은 않다. 상대를 주적(主敵)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 한편에서는 통일을 얘기하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극복해야만 한다. 사람이, 가족이 결코 전쟁과 정치적 이전투구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된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대결과 긴장, 전쟁 분위기를 그들의 수명을 연장할 인공호흡기 정도로 생각한다면 역사는 그들을 꼭 기억할 것이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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