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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통쾌한 복수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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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의 <말하는 돌>/1981년

'인류가 전쟁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다.' 존 F. 케네디의 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 전쟁만큼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던 것은 없을 것이다. 전쟁없는 세상, 평화가 인류의 요원한 꿈처럼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것일까. 당시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해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되었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제4장 '말들의 나라' 편에는 휴이넘(Houyhnhnm)이 반짝이는 돌 때문에 싸우는 야후(Yahoo)를 경멸하는 대목이 나온다. 야후는 다름아닌 인간이다. 그렇다. 모든 전쟁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좋은 전쟁'이란 없다. 전쟁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한 전쟁은 살육과 인간성 상실의 막장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전쟁은 뒤틀린 역사를 또 한번 요동치게 했고 반목과 대립의 원인으로 수십년 동안 트라우마처럼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해방 공간에서 전개됐던 좌우 대립과 이 와중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 신념이 더해지면서 이유없는 살육이 횡횡했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려 미래로 내딛는 걸음에 걸림돌이 되고있다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문순태의 소설 <말하는 돌>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고 또는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전쟁 당자자의 구분은 단어 활용의 한계일 뿐 가해자와 피해자는 전쟁이라는 괴물 앞에 모두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통쾌한 복수

소설 <말하는 돌>은 주인공 '나'가 못생긴 돌 하나를 들고 어렵게 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저그런 평범한 돌을 애지중지하는 것일까. 나에게 이 못생긴 돌은 아버지의 분신이자 영혼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전쟁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부면장네 머슴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전쟁이 터지자 부면장네 가문을 지키기 위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죽창을 들었고 이 사건은 결국 부면장 부자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결국 부면장 부자를 죽인 당사자들에 의해 까치산 꼭대기에서 살해되고 만다. 주인공 '나'는 친구 장돌식이와 함께 아버지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덮었다. 그리고는 복수를 다짐한다. 아버지를 죽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던 마을 사람들 전체를 상대로.

나는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릴 생각은 않고 무표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말하는 돌> 중에서-

'나'의 복수는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에 통쾌하게 이루어진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는 신분을 숨긴 채 친구 장돌식이와 함께 아버지의 묘지 이장에 마을 사람들을 동원한 것이다. 완벽한 복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나'의 복수는 허망하게도 부끄러움만을 남기고 만다. 왜?.

그리고 특히 이장을 할 때는 30년 전 아버지를 까치산으로 끌고 간 네 사람 모두 인부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월곡리 사람들에 한해서 누구든지 까치산 꼭대기까지 떼를 떠오면 한 장에 천 원씩 주겠다고 하였다. -<말하는 돌> 중에서-

'이 불효막심한 놈아' 말하는 돌의 상징

'나'의 신분을 밝혔을 때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도 담담했다. 오히려 이미 늙고 나약해진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복수를 꿈꿨던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복수가 또다른 복수로 이어지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도도히 흘러온 세월은 마을 사람들과 죽은 아버지 사이에는 암묵적인 사과와 용서를 통한 화해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황부우 아들이라고 밝힐 것이재 원!"
"아들이 잘된 걸 보니 돌무덤 자리가 명당이었던갑구만."
"황바우 일이라면 우리가 이르케 많은 돈을 반기가 미안헌디."
"참말로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일이구만."
"그나저나 돈 벌어서 효도 한번 푸지게 잘했네그려." -<말하는 돌> 중에서-

아버지의 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서 가져온 돌이 고함쳤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사실 마을 사람들의 직접적인 사과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저자는 이념이나 계급보다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나'의 복수는 이념과 계급을 초월했던 아버지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말았던 것이다. 말하는 돌은 과거에 대한 복수가 아닌 화해의 상징이자 친구 장돌식이와의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순수성의 회복이라 하겠다. 그 중심에는 계급도 이념도 아닌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말하는 돌'이라는 동화적인 냄새가 풍기는 제목에서도 저자의 이런 의도는 충분히 감지된다.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은 사과와 용서, 그 뒤에 같이 가야할 화해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록 마을 사람들의 과거 가해자로서 또는 방관자로서의 사과가 세월에 침식돼 은유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말이다. 역사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미의 과거 청산도 과거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를 살아갈 새로운 동력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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