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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첫눈> 눈오는 밤 왕포집 여자들에게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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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웅(1942~)의 <첫눈>/「월간문학」38호(1972.1)

한국 문학과 지성의 양대 산맥이라고 하면 흔히들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과 그로부터 4년 후 첫 선을 보인 《문학과 지성》을 꼽는다. 서로 다른 색깔, 즉 민족문학 계열의 《창작과 비평》과 순수문학을 대변하는 《문학과 지성》은 각각 '창비 계열'과 '문지 계열'의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해 내면서 한국 문학과 지성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창작과 비평》은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정부패와 친일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정난에 허덕이다 1970년 폐간된 이후 맥이 끊길뻔 했던 한국 진보 지식인들의 담론의 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런 《창작과 비평》이 배출해 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방영웅이다. '똥례'라는 주인공을 통해 기층민중의 삶을 시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로서는 베스트셀러였던 방영웅의 장편소설 <분례기>가 1967년 《창작과 비평》에 연재되면서 창간 1년 만에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분례기>라는 제목에서 보듯 작가 방영웅은 소외된 사람들을 그저 슬픔이 아닌 해학적이고 희화적인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창조해 냈다. 웃음 뒤에 밀려오는 눈물이라고나 할까?

1972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방영웅의 단편 소설 <첫눈> 역시 그만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허름한 뒷골목으로 내쫓긴 사람들

서울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뒷골목, 여기에는 길 양쪽으로 대폿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반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서울로 모이던 시절, 이 대폿집 골목에는 첫눈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다.

눈발이 내리든지 말든지 그까짓 것은 관심이 없고, 서울엔 웬 놈의 사람들이 저렇게 많으냐 말이다. 뭐 해 처먹으로 몽땅 서울로 올라왔어? 서울만 살 수 있다데? 응 그래서……? 나두 그건 알 수 있어. -<첫눈> 중에서-

왕포집은 이 대폿집 골목 풍경의 한켠을 채우고 있다. 철순이, 미스 윤 그리고 병숙이는 왕포집의 매미같은 작부 아가씨들이다. 여기에 한 명 더 강원도댁은 이 술집 주방장이다. 말이 주방장이지 강원도댁은 이미 원주에서부터 몸파는 일을 해온 술집 작부이기도 하다. 남편과 사별하고 고향에는 시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며느리이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들이 왕포집에 오게 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만 저자는 굳이 밝히지 않는다. 어느 CF에서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산업화라는 구호 아래 내쫓긴 사람들, 그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이 이 왕포집이라는 것쯤은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인생 막장으로 내몰린 사람들, 그들의 슬픈 이야기는 전혀 슬프지 않게 전개된다. 아니 그들의 슬픔을 공감하려는 순간 저자는 그만의 독특한 해학적 상상력으로 독자의 긴장감을 한 순간에 허탈하게 만들고 만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새로운 잔상이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작위적인 슬픔보다 더 진한 눈물이....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

저자는 하필 왜 첫눈이었을까? 설레임과 첫사랑이 연상되는 첫눈이지만 없는 사람들에게는 겨울보다 여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설은 강원도댁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그 매개가 바로 첫눈이다. 눈은 궁핍한 삶을 더 궁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이다.

사람이 이렇게 살기 어려운 데가 있을까? 강원도댁이 그것을 알았던 것은 화전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거기서 제일 가까운 읍내는 사십리였다. 그것도 평지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눈이라도 쌓이는 겨울철이염 사람의 왕래가 딱 끊어지고 만다. - <첫눈> 중에서-

게다가 눈은 증거인멸이고 이들이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새로운 삶을 지워버리고 마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억압적 구조와 기형적 산업화의 상징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더니 첫눈 내리던 어느날 세 명의 젊은 남자 손님들로 왕포집 여자들은 오랫만에 돈을 손에 쥘 수 있었으나 이 손님들은 그저 그런 술집 손님들이 아니었다. 눈밭 위에 그 흔한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왕포집을 털어버린 도둑들이었다. 

경찰이 그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감히 그들이 누구라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내지 않는 귀신들인데 감히 그들이 누구라고?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옥동자들인지도 모른다. -<첫눈> 중에서-

웃음 코드로 반전의 묘미를 더 해 준 이 마지막 문장에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민중들의 삶이 그려지는 것은 비단 1970년대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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