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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고부 갈등으로 되돌아본 보도연맹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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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의 <미망>/1982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싸움은 늘 일방적이었다. 어머니 쪽에서 먼저 발작적으로 할머니의 마땅치 못한 행동거지를 두고 험구했고 할머니는 조개가 아가리를 다물 듯 침묵으로 며느리의 그 따가운 수모를 목묵히 견뎌냈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공격이 잠잠해지면 할머니는 담배를 한 대 물고는 이렇게 어머니 듣게 혼잣말을 했다.

"그래, 그래. 니 말이사 다 맞지러. 등신같은 이 늙어빠진 시에미가 잘한 기 머 있노. 자슥을 잘 낳았나. 낳은 자슥을 잘 키웠나. 아무것도 잘한 기 읎지러. 하늘 보기 부끄러버 거리귀신 돼서 객사하든가, 약 묵고 죽든가 해야지러." -<미망> 중에서-

범같은 체격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장작개비처럼 깡 마른 할머니를 구박했을까.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구박이라는 상식을 파괴한 이 집안의 고부 갈등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김원일의 소설 <미망>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고발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당면한 현실을 극복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죽은 할머니의 꽃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붙은 '보도연맹 가입증'은 소설 <미망>의 주요한 모티브이기도 하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평생 부딪쳐 온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부 갈등은 아픈 가족사 또는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대하는 서로 다른 시선의 표출이기도 하다.

보도연맹사건이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독자라면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서울을 수복한 국군이 진태(장동건)의 집에 들이닥쳐 진태의 애인 영신(이은주)을 체포한다. 죄명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영신은 절규한다. 쌀을 준다고 해서 가입했을 뿐 보도연맹이 무슨 단체인지도 모른다고. 결국 영신은 죽게 되고 영신을 구출하고자 했던 진석(원빈)마저 빨갱이 누명을 뒤집어 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태는 북한 깃발부대의 대장으로 변신하게 된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사상통제의 목적으로 1949년 좌파 전향자들로 조직한 반공단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실적 위주의 지역 할당제가 되면서 일반인까지 가입을 강요받으면서 실제 가입자수는 30만 명을 넘게 되었다. 영화 속 영신이 그랬던 것처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은 민간인 학살의 주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에 밀리면서 보도연맹 초기 가입했던 사상범들이 북한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보도연맹 조직원들에 대한 무차별적 검속과 즉별처별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던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가입을 강요당했던 많은 보도연맹 조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야만 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가 되었다.

비극적 가족사를 대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태도

소설 <미망>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은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혹은 행방불명) 아버지와 '빨갱이'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가야만 했던 현실적인 선택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연히 이 집안의 고부 갈등은 시어머니의 며느리 구박에서 시작했지만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아버지가 죽은 이후 정반대의 양상으로 바뀌는 형국이 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소심한 성격의 할머니. 할머니의 태도는 아픈 한국 현대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성격만큼이나 위축된 삶을 살아간다. '빨갱이' 아들의 어머니로서 책임감도 할머니를 더욱 작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할머니 스스로 자신에게 강요된 사회적 낙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죽은 후에 발견된 아버지의 보도연맹 가입증에서 모성애마저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보게된다.
 
반면 어머니는 체격이나 성격 면에서 할머니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몰락한 유생 집안의 딸이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성격은 타고난 본성보다는 환경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구박을 받고 살아온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상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어머니에게 억척스러움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운명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가치평가는 무의미했다. 이념이나 낙인이 어머니의 생존투쟁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할머니의 임종 순간에 극적 화해를 시도해 본다.

어머니는 준옥이 손을 잡고,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내 다급한 걸음과 얼룩진 눈을 보고도 어머니는 애써 눈길을 피했다. 네 할미가 어찌 됐냐고 물으시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가 그때 들고 오신 비닐봉지 속에는 간갈치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미망> 중에서-

저자는 분단과 이념대립, 전쟁의 상처를 고부 갈등이라는 가족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지만 1980년대 초 당시로서는 다루기 힘들었던 보도연맹사건을 주요 소재로 채택함으로써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고발하려 했을 것이다. 최근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그 유가족에 대한 명예 회복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다행히도 참여정부 시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보도연맹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당시의 끔찍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는 게 전쟁이다. 누가 그랬듯 진실은 구름 위에 있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역사의 책임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이념이 사람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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