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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포대령' 누가 그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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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승세(1939~)의 <포대령>/「세대」63호(1968.10)

문명의 이기는 인간에게 늘 행복만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단순히 철학적, 종교적 의미의 행복을 논하기 위한 자문이 아니다. 행복의 질을 논하기에 앞서 문명의 이기와 그로 인한 생활의 진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행복 사각지대를 연명해 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집단과 사회라는 단어로 똑같은 군집생활을 동물과 차별화하는 인간이지만 실상은 동물 집단보다 더한 약육강식이 횡횡하는 곳이 인간 사회다. 어쩌면 사회라는 말은 이성의 남용이고 인간의 자만인지도 모른다. 소외된 사람이 있어야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는 동물이 인간이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 최소한의 소외된 자들이 존재해야 하는 곳이 사회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어야 한다. 국가는 차고 넘치는 때로는 한참 모자라는 유리병 속의 물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 소외된 슬픈 자화상이 있다. 천승세의 소설 <포대령>은 기억 저 편으로 내몰리는 한 인간의 삶에대한 처절한 투쟁을 보여준다. 아니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느 퇴역 군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소외된 군상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물론 저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사회와 국가라는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이 아니고라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달봉, 그는 어느 포병 부대 연대장 출신의 퇴역 장교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포병의 상징적 존재였다. '포대령'이라는 별명은 그가 얼마나 투철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실제로 막삭인 아내를 적군의 포화 속에 방치해(?) 두었을만큼 포탄으로 살다가 포탄으로 다져졌고 포탄 속의 전사가 아니면 죽음이 없다는 그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허술한 사복 차림으로 명동의 한적한 다방 한 구석에서 낡은 선풍기 바람이나 통째로 받는 백수로 살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소설 <포대령>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건 단순히 주인공 김달봉의 비극적 최후 때문만은 아니다. 포대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다름아닌 과대망상증이었다. 과대망상에 시달리던 포대령은 채석장 다이나마이트 폭음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왜 하필 채석장이었고 그는 왜 과대망상에 시달렸을까? 


언젠가 TV로 생중계까지 되었던 탈주범들의 인질극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정통성이 없었던 군부 정권이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선택한 이례적인 인질극 생중계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탈주범이 절규하듯 외쳤던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여지없이 들춰내고 말았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극악한 탈주범들의 입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니 말이다. 비단 당시의 사회만를 비꼰 말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단면을 관통하는 말이다.

포대령의 과대망상은 이런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전사만을 죽음으로 생각했던 포대령에게 닥쳐온 현실의 장벽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군인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영관급 장교로의 진급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투철한 직업 정신에 대한 신념의 좌절은 포대령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망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포대령의 등산모에 달린 함석으로 만든 별은 그가 군인으로서 이루고자 했던 꿈은 아니었을까? 돈만 있으면 만사형통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아부라면 숫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질색인 포대령이 대령을 마지막으로 전역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니었을지...

또 포대령의 과대망상은 당시 사회의 억압구조 속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68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포대령의 과대망상증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4.19 혁명 정신을 거부한 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국민들의 반발을 가장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분단체제의 영구화였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우리 사회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요즘도 유용한 통치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포대령의 과대망상 증세는 분단체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임마! 현재는 모든 공간이 영내야! 모든 사람들은 모두 포병이어야 해! 모든 모순은 다 적이야! 생활하는 모든 순간은 치열한 전선이야!…… -<포대령> 중에서-

한편 본격적인 근대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개발의 뒤안길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상징이 포대령이기도 하다. 국가로부터 소외된 이들에게 삶에 대한 투쟁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선임에 틀림없다. 채석장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폭음을 적의 포탄으로 착각하고 다이너마이트 폭발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포대령에게 따뜻한 연민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의 나레이션을 맡고 있는 내가 포대령의 과대망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새삼 소설 속 한 장면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은 1960년대 당시와 21세기인 오늘의 현실이 거울을 보듯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게 있다면 국가의 폭력이라든지 국가가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방식이 그 때는 노골적이었다면 지금은 교묘하고 지능적이어서 쉬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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