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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샤갈의 마을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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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우(1958~)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문학사상」217호(1990.11)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동네마다 있음직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누구나 샤갈의 그림 중에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작품이 있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아니란다. 오히려 그 출처를 찾는다면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가 맞지않을까 싶다. 물론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샤갈의 그림 '비테프스크 위에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그동안의 상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샤갈의 그림과 김춘수의 시에서 보듯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희망을 상징한다.

이 절묘한 언어의 유희를 만끽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박상우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그것이다.

저자 박상우가 소설의 제목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 붙인 이유가 샤갈의 그림이나 김춘수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 작품이 모두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찾기'라는 작은 주제만은 동일해 보인다.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이다. 새 연대의 시작과 함께 모든 게 급작스럽게 변해버린 현실을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고뇌를 시간의 흐름에 맞춰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들춰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90년대 초 학번인 내가 대학 새내기 시절 복학한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사회를 바라보는 서로의 시선 사이에 크나큰 갭이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80년대 학번이었던 선배들은 90년대 학번들이 술자리에서 쏟아내는 대중가요가 무척이나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대학생활의 대부분이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던 80년대 학번들에게 이 풍경은 그야말로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그런 혼란이 아니었을까? 연대만 바뀌었을 뿐 그리 긴 시간의 틈이 아닌데도 말이다.

박상우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주목하는 시간적, 시대적 공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시대적 고민이 사라져버린 공간, 이 공간에서 그들은 거리를 방황하고 연대만이 살 길이었던 80년대를 거친 새 연대(90년대)의 시작은 꽉 움켜쥐고 놓지않으려 했던 그들의 손들이 맥없이 풀려버리는 분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관심사로 한때 내남없이 침을 튀기고 핏대를 올리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대신 증권과 부동산, 고스톱과 포커, 그리고 방중술과 포르노에 관한 얘기로 시간의 공백을 메워나가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여섯 명의 술자리가 하나 둘 이런저런 이유로 둘만 남았을 때 저자가 고민하는 대목은 따로 있지 않았나 싶다. 국가폭력이 극에 달했던 80년대, 끈끈한 연대의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결과로 쟁취한 87년 6월의 승리, 사회는 더 이상 80년대의 연대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승리에 불과했다. 뒤이은 민주화 세력의 분열은 또다시 국가폭력을 주도했던 군인의 손에 정치를 맡기고 말았다. 껍데기만 변했을 뿐 정치의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가 고민하는 현실인식이다. 여전히 연대의 필요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샤갈의 마을에서 본 것은 이들이 80년대 떼로 몰려다니며 고민했던 정치를 비아냥거리고 이들과 자고 싶다는 여자의 헛된 욕망 뿐이다. 목적의식이 사라져버린 90년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국가 폭력과 정치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가운데 위장된 민주화로 느슨해져버린 연대의식을 회복하려는 저자의 의지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몽중에 그러는 것처럼, 그때 우리 중 하나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나머지 하나의 손을 필사적으로 거머쥐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샤갈의 마을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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