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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문학은 자본의 상업적 가치로 평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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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1993년

 

풋풋한 첫사랑을 떠올릴 때면 추억하는 단어가 있다. '문학소녀', '문학소년'. 모든 첫사랑이 해당되는 건 아니다.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는 그런 나이가 있었다. 감정의 변화가 질풍노도처럼 휘몰아치던 시절 방황의 한 켠을 매우고 있는 것은 늘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문학을 진짜 마음을 담아 접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시인의 마을. 당시 작가란 직업은 물욕의 정점, 종교와도 같은 순수한 영혼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첫사랑이 떠나가고 그 거리만큼 문학이 소원해질 때도 상상 속 작가의 이미지는 그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작가의 삶은 우리네 상상 속 그것일까?

 

구효서의 소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의 주인공 '나'는 작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전업 소설가다.  전업 초기 월요일 저녁에 입은 잠옷 바지를 다음주 월요일 저녁까지 줄창 입고 있을 수 있는 직업이 전업이라고 생각했던 '나'다. 그러나 전업 2년차 여름, 전업에 대한 '나'의 생각은 중대한 전환점에 서게 된다.

 

나는 우주만 해진 배를 안고 자주 광화문과 종로엘 나다녔다. 오늘은 어떤 하찮은 얘기들이 진지하게 출판됐으며, 누구의 진지한 얘기가 하찮게 출판됐는가 보려고. 광화문 교보문고는 작가의 한숨들로 가득한 곳이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중에서-

 

전업 소설가로서 '나'가 맞닥뜨린 현실은 청국장 냄새 가득한 종로3가 뒷골목에서 밥을 먹고는 허겁지겁 큰길가로 빠져나와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나'는 일년 원고료 팔백만 원으로 살 수 있지만 이 돈으로는 애 둘 데리고 살 수 없다는 아내의 타박뿐이다. '나'의 욕신은 거대해진 복부 한편에 붙어있는 작은 부속물처럼 느껴지면서 아내에게는 대박 소설을 구상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대전 근교 대청호 근처 작은 절로 들어간다. 소설가로서 '나'의 존재 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돈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의 소설도 결국에는 상업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깡통따개는 상업주의의 파고 속에 무용의 가치가 되어버린 소설가 '나' 자신의 분신인 셈이다. 간단하고 간편한 원터치 캔이 사방천지에 널린 세상에 깡통따개는 본연의 용도를 상실한 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인 '나'에게 소설은 감옥인 동시에 자유다. 원터치 캔의 등장과는 상관없이 나의 존재 이유다. 소설은 그렇게 현실인 자본주의의 속성에 '나'의 실존적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방 안에서 나는 향기라곤 내가 가져온 존슨즈 베이비 로션 냄새뿐이었다. 산이나 들에 가서 사과나 오이 따위를 무심코 깨물다 그 향기에 깜짝 놀라듯, 나는 존슨즈 베이비 로션의 그 돌올한 냄새에 흥분마저 됐었다. 꽃을 꽂아보겠다는 생각도 아마 그런 데서 나왔을 것이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중에서-

 

'나'를 둘러싼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다. 왕년에 서커스단에서 탈출사로 이름을 날렸다가 지금은 절에서 불목하니(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로 일하고 있는 그 남자를 통해 '나'는 무의식 중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현실적 욕망을 발견하고 만다. 스타를 꿈꾸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탈출 비법을 익히고 있는 불목하니는 '나'가 실존적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했던 거짓말 '대박 소설'이 실제 '나'의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아내의 타박처럼 불목하니도 번번히 스님으로부터 '제 입 하나 추스를 줄도 모르는' 인간으로 폄하되고 만다. 소설가인 '나'에게도 스타를 꿈꾸는 왕년의 탈출사 불목하니에게도 현실은 늘 이렇게 추레한 모습뿐이다.

 

 

결국 '나'는 아이가 낚싯바늘을 삼켰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절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도중에 잠시 내렸지만 그곳이 어딘지 모른 채 길을 잃고 만다. 세상 모든 것을 계량화된 가치로 평가해 버리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싸워야만 하는 작가 자신의 현실이자 예고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자는 소설가인 자신의 얘기를 왜 굳이 소설로 발표했을까. 저자는 자신의 얘기를 통해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수량화된 가치, 돈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가 평가되고 마는 현대인의 비루한 삶을 보여주고자 했음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노동은 치열한 것을 요구할 뿐 감상적 기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노동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로 행·불행이 갈립니다. 저는 그 숨 막히는 노동의 세월을 '글감옥'이라고 표현했고, 그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저자 조정래 작가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쓴 그의 자서전 <황홀한 글감옥>에 언급된 말이다. 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에서처럼 글쓰기를 노동이자 자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상업적으로는 가치가 매겨질 수 없는 문학의 힘에 대한 작가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일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작가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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