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김명학씨가 현관에 발돋움길을 만든 이유

반응형

김광식(1921~2002년)의 <213호 주택>/1956년

 

김명학씨는 길가에서 현관으로 들어오는 뜰길에 발자국을 내고 그 발자국 하나하나를 파낸 다음 벽돌 두 장씩을 홈에 넣어 발돋움길을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다.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서는 현관문 손잡이 근방을 미친듯이 파내고는 눈을 감고 손잡이 부근을 쓸어보고 있다. 돌았냐는 아내의 핀잔에 김명학씨는 가엾은 대답만 할 뿐이다.

 

"돌아? 누가…… 돌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해놓는 거야"

 

그리고는 길가로 나가 현관 발돋움길을 눈을 감고 걸어가 문의 손잡이 부근을 쓸어보고는 문을 열어보는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남편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는 아내의 눈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흐른다.  

 

김명학씨의 기이한 행동으로 결말을 맺는 김광식의 소설 <213호 주택>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년)를 연상시킨다. 왜 김명학씨는 현관에 발돋움길을 만들고 있으며 이를 지켜보는 아내는 또 왜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까. 

 

 

기계문명의 매카니즘을 비판하다

 

찰리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추방당하는 계기가 되었던 <모던 타임즈>는 끊임없이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에서 사장의 재촉으로 나사처럼 생긴 것은 뭐든지 조이려는 정신병에 걸린 떠돌이 찰리 채플린이 정신병원에 이송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찰리 채플린은 1930년대 당시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인간 소외의 문제를 한 편의 무성영화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광식의 소설 <213호 주택>은 주인공 김명학씨가 기계가 사전에 고장날 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해 삭막한 상도동 일대를 방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후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든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세월을 훌쩍 넘어 21세기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 김명학씨의 방황은 이 시대 아버지요, 가장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김명학씨의 사직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의 속성은 인간보다는 능률을 우선시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한낱 기계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공고 기계과를 나온 김명학씨는 인쇄소의 기사장이 되어 평생을  성심성의껏 기계와 살아왔다. 그러나 김명학씨는 그런 기계 때문에 오늘 면직을 당하게 되었다.

 

제1, 제2, 제3, 제4, 제5 기계실을 빙 돈 후 출입구에 서서 인쇄기를 바라볼 때 그는 그 인쇄기들이 움직이는 괴물처럼 보였다. 또 자기를 덮칠 것같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213호 주택> 중에서-

 

기계 뿐일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은 사회라는 조직 안에서 의무나 약속, 규칙, 질서 등이 강제적으로 개인에게 요구된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하에서는 다양성이 보장되고 촉진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인간은 몰개성과 몰인격을 강요당하면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자유, 노동의 기쁨은 자본의 탄압을 숨기려는 헛구호일 뿐이다.  아직 본격적인 근대화와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인 1950년대 기계문명의 매커니즘을 비판한 이 소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문명의 이기가 생활의 편리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김명학씨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비극은 공장이라는 조직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 준 문명의 이기가 오히려 인간을 획일화시키고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만다. 자로 잰듯 잘 정리된 아파트는 현대인의 고독와 외로움의 상징이다. 소설에는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아파트 대신 연립주택이 등장한다. 

 

잔잔한 계곡을 타고 자리잡은 꼭같은 형의 특호 주택, 꼭같은 형의 갑호 주택, 꼭같은 형의 을호 주택이 줄줄이 좌우로 마치 전차 기갑사단이 푸른 기를 꽂고 관병식장에 정렬하여 서 있는 것 같은 감이다. 관악산의 줄기가 병풍처럼 천여 호의 주택을 둘러쌌다. 이 주택촌을 상도동이라고 한다. -<213호 주택> 중에서-

 

획일화된 현대인의 삶은 주택뿐만이 아니다. 매일 꼭같은 시각에 타야하는 질식할 듯한 만원버스도 몰개성의 현대인을 상징하는 소구로 등장한다. 개성이 상실된 현대인의 비극은 김명학씨가 을호 주택 3행길 213호인 자신의 집을 술에 취해 4행길 213호로 잘못 들어가 도둑으로 몰려 유치장 신세를 지는 장면에서 절정으로 치닿는다.  

 

믿을 건 사람이라지만...

 

1950년대 소설이라기보다는 21세기 우리사회의 비극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면직을 당하고 집으로 향하는 김명학씨의 모습은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시대 아버지의 그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남같이 아이들을 먹이고 기르지 못한다는 슬픔보다도 저 눈들이 저 몸부림들이 아팠다. 내일부터 면직을 당한 아버지를 바라볼 아내와 자식들의 눈들이 슬펐다. -<213호 주택> 중에서-

 

기계에 일터를 내준 현대인의 비극을 오로지 기계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너무도 허술해 보인다. 기계를 운용하는 이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이도 결국엔 사람의 몫이거늘 우리사회의 왜곡된 지배구조는 현대인의 비극과 고통을 이중 삼중으로 배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 정당에서 내놓은 해법이 하도급의 합법화라고 한다.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에 정규직 전환을 요구할 기회마저 봉쇄해버린 그야말로 꼼수에 불과하다. 기계문명의 매카니즘도 결국에는 운용의 묘다. 그리고 그 운용의 묘는 인간의 몫이다.

 

김명학씨가 현관에 발돋움길을 만들고 현관문 손잡이를 파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기계문명의 매카니즘에 대한 저항의 표시이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몰개성, 몰인간성을 부추기는 사람, 권력에 대한 항거의 의지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은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으로 희망을 품고 걸었던 저 길의 끝에 21세기 오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