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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이 남자가 애인 앞에서 줄행랑을 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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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박영준의 『모범경작생』/「조선일보」(1934.1.10~1.23)/창비사 펴냄

일본 시찰에서 돌아온 길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애인 의숙을 찾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바나나를 들고 밤이 으슥할 무렵 의숙을 찾았건만 길서를 본 의숙은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의숙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아는 길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길서는 애인 의숙이 보는 앞에서 들고 있던 바나나를 쥐고는 뒷문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남자로서, 애인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왜 길서는 줄행랑을 쳐야만 했을까?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박영준의 소설 『모범경작생』은 관주도 농촌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발표하는 각종 장밋빛 정책들과는 달리 농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궁색해지고 피폐해진다. 이런 농민들과 관 사이에는 길서가 있다. 길서의 논에는 '모범경작생'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길서의 도망은 '모범경작생'의 의미와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결정적인 장면이 된다. 결국 작가 박영준이 설정한 '모범경작생'은 허구적 농촌정책을 비꼬기 위한 풍자 도구인 셈이다. 한편 관주도의 관을 위한 정책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무원 사회의 병폐로 지적되고 있어 뒤끝이 개운치 못함을 느낀다. 게다가 자발적 시민단체까지 관의 통제하에 두려는 권력의 횡포와 독선이 횡횡하는 지금을 생각하면 비록 80년 전 소설이지만 생생한 현실을 보는 듯 미간을 찌푸릴 수 밖에 없어진다.   

길서는 누구의 모범경작생이었나

박영준의 소설 『모범경작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일제의 소위 말하는 '농촌 진흥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운동은 당시 우리 언론사와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수양동우회(훗날 있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이광수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라는 단체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 맞춰 문학계에서도 농민문학론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인구의 80%에 달했던 농민들의 계몽운동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 운동은 힘을 잃게 되고 때로는 변질되기에 이른다. 결국 '농촌진흥운동'의 주도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게 되고 조선총독부는 이 운동을 자신들의 정책에 부응하는 세력집단을 키워가는 계기로 삼게 된다. 『모범경작생』 주인공 길서도 이런 조선총독부의 음모로 탄생한 인물이다. 어찌됐건 길서는 마을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나왔고 군에서 개최하는 몇 안되는 농사 강습회 회원에다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현실과 달리 자기 땅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길서는 이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병충해니 흉작이니 소작료 등으로 시름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호경기가 곧 도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만 할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일본 시찰단에 뽑히기 위해 면장과 지주의 호세(살림살이를 하는 집을 표준으로 집집마다 징수하던 지방세)에 찬성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도지(소작료)를 감해 보자는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소작쟁의라며 단박에 거절해 버리는 인물이다. 

'모범경작생'이란 관이 아니 일제가 붙여준 호칭일 뿐이었다. 그는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철저히 관의 나팔수를 자처했다.  

 "불경기 불경기 하지만 이것이 얼마 오래갈 것이 아니며 한 고비만 넘기면 호경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으니까 요사이에 감옥에 가장 많이 갇힌 죄수들은 일하기가 싫어서 남들까지 일을 못하게 하는 놈들이래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라나요.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놈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부치던 땅까지 못 부치게 될 것이니 결국은 농군들의 손해가 아니겠소." -『모범경작생』 길서의 말 중에서-

신관변단체를 생각하다

길서를 통해 오늘날 관변단체를 떠올리게 된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관변단체란 과거 독재정권에서 국민을 통제하고 계도하겠다는 발상으로 설립된 단체로 지원을 해주는 관에 기생해야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니 새마을운동협의회니 한국자유총연맹 등이 대표적인 관변단체라고 할 수 있다.
40대 이상 성인들에게는 선거철만 되면 여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돈봉투를 뿌리던 관변단체에 대한 기억이 뚜렷할 것이다. 결코 음성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관변단체의 폐습들이 권위주의 해체와 함께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부정책의 나팔수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는 '돈먹는 하마' 라는 인식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비영리민간단체(NGO)의 자발적 공익활동과 건전한 민간단체로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생겨난 정부지원금제도가 신관변단체의 출현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뚜렷한 공익활동의 성과도 없는 단체가 정부지원금을 받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전처럼 노골적으로 정부 홍보를 못한 기존 관변단체를 대신해 민간단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는 신관변단체가 되고 있다. 이들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나 단체를 '좌파'니 '빨갱이'로 매도하고 심지어 불법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의 잣대는 늘 자비롭고 너그럽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장난으로 호세까지 올랐다는 것을 다음에야 알고 누구 하나 그를 곱게 이야기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길서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오빠의 말을 들은 의숙이도 눈물을 흘리며 길서가 그렇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모범경작생』 중에서-

길서가 일본 시찰단 일원으로 가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모범경작생'이었던 길서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길서의 논에 박은 '모범경작생'이라는 말뚝은 누군가에 의해 쪼개지고 말았다. 애인 앞에서 체면 불구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만 했던 길서. 80년 전 도망간 듯 했던 길서는 80년 세월을 여전히 살아 있었고 21세기인 오늘도 권력의 비호 속에 시민사회의 건전성을 해치는 또 한 번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정부의 편의주의적이고 반시민적 발상이 길서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과 시민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길서 애인 의숙의 눈물은 배신한 연인을 향한 분노로 타오를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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