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그녀에게는 배설할 권리마저 없었다

728x90
백신애의 <적빈>/1934년

백신애는 1929년 박계화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어 등단한 여류 소설가다. 30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녀가 소설로 말했던 가난과 여성의 문제는 짦은 생을 무색케할 만큼 긴 여운을 남긴다. 백신애는 여성동우회와 여자청년연맹 등에 가입해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소설들에서 보여주는 리얼리즘도 직접 대중 속으로 뛰어들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백신애의 소설은 경향파적 성격이 강하지만 경향문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살인이나 방화 등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여성의 섬세한 필치로 서민대중의 궁핍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34년 발표한  <적빈>은 백신애 소설의 가장 큰 주제라 할 수 있는 빈곤과 여성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매춘네 늙은이를 통해 당시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빈곤과 가부장적 폐습 속에서 고통받는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적 폐습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은진 송씨로서 송우암 선생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매촌네 늙은이가 무능력자인 두 아들과 며느리를 부양하기 위해 온갖 경멸을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은 빈곤이 가져다 주는 파멸의 끝을 보여준다. 한편 이 와중에 태어난 손자, 손자에 대한 매촌네 늙은이의 집착은 가부장적 구조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 가부장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토록 처절하게 묘사된 가난은 없었다

가을 밭에 가면 가난한 친정에 가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적빈'은 제목 그대로 1930년대를 살아가는 조선민중의 극단적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주인공 매촌네 늙은이는 식민지 민중 특히 식민지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과 빈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자와 어린이다.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매촌네 늙은이에게 명문가의 후손은 그저 허울좋은 말 뿐이다. 새파랗게 어린 면장네 아들에게 면박을 당하고도 '돈 없고 가난하면 지금 세상은 이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두 아들이 있지만 무능하기 그지없고 그 아들에 그 며느리인지 예순이 넘은 늙은 어미는 어머니이기 전에 실질적인 이 집의 가장이다.
 
저자 백신애가 주목하는 여성, 식민지 여성에게 가장 큰 적은 빈곤이다. 저자는 식민지 여성이 겪어야만 했던 빈곤의 문제를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인양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느 집 일 좀 도와주고 얻은 김치 찌꺼기와 간청어 꼬리, 먹덕 밥과 보리 섞인 밥 한 그릇을 씹지도 않고 뭉텅뭉텅 삼켜버리는 매촌네 늙은이의 모습에서 돈이 인격을 만든다는 말을 새삼 되내이게 한다. 특히 매촌네 늙은이가 큰며느리의 해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가 마려워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보다 처절하게 묘사된 가난은 여지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똥힘으로 사는데...'
하는 것을 생각해내었던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들 밥 한술 남겨 두었을 리가 없으매 반드시 내일 아침까지 굶고 자야 할 처지이므로 지금 똥을 누어버리면 당장에 앞으로 꺼꾸러지고 말 것 같았던 까닭이었다. -<적빈> 중에서-


빈곤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리현상마저 통제한다면 그 가난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게 된다. 저자가 당시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 보았던 식민지 여성의 삶은 이보다도 더 처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끝내 여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흔히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질투어린 여성을 일컫는 말만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옥죄는 온갖 관습과 폐습들 그리고 사회구조적 모순들, 여성들이 극복해야되고 투쟁해야 될 대상이지만 어느 순간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때로는 이러한 사회적 굴레에 순응해 버리고 안주해 버리는 이중적 태도의 여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모성애'라는 말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을 합리화시키려는 남성중심사회의 유행어인지도 모른다.

소설 <적빈>에서 매촌네 늙은이가 보여주는 태도는 식민지 여성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빈곤 말고도 또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바로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매촌네 늙은이에게 유일한 희망은 큰며느리에게서 얻은 손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일한 희망은 그녀를 더욱 더 가난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그녀는 무능력한 두 아들을 보면서도 가부장적 사회가 준 선물을 통해 빈곤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성애'의 힘으로 여기기에는 반복되는 가난의 악순환이 눈에 보이는 듯 해  안타까운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늙은이는 잠시 가만히 앉아 예순 셋에 처음으로 보는 손자라 그런지 몹시 감격하여 눈을 쥐어지르듯 자꾸 눈물을 닦으며 또 한 번 아기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 보았다. 이 아이가 사내란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그리도 기쁜 일인지...-<적빈> 중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는 비너스(미의 여신,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손거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남성의 '♂'는 아레스(전쟁의 신)의 방패를 상징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에게는 나약하고 소극적이며 쾌락적이고 향락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그러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스페인, 1599~1660)의 그림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서 보듯 요염한 자태의 뒷모습과 우리의 상상 속에 그려진 비너스의 모습과 달리 거울에 희미하게 나타난 비너스의 얼굴은 어디 한 군데 미인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그림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적빈>을 읽으며 새삼스레 떠오른 속담이 하나 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 빈곤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는 속담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역사가 만들어 낸 억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이라는 개념의 직접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가는 요즘 빈곤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야 된다'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