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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왼손잡이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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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조광」12호(1936.10)/창비사 펴냄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릭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 편의 짧지 않은 시를 읽는 듯 서정적이다. 소설을 시문학으로 한단계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 유진오 등과 동반작가로도 불리는 이효석은 구인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그의 소설과 달리 실제 생활은 커피를 마시고 버터를 좋아하는 등 도시적 면모가 강했다고 한다.

『메밀꽃 필 무렵』만 본다면 작가 이효석의 작가로서의 천재성을 확인하는데 손색이 없다. 아름다운 언어의 유희 속에 당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묻혀버리기도 하지만 감수성을 자극하는 서정적 표현들이 애달픈 정서를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30년대 유행했던 농촌소설 중 농민들의 자각을 통해 새 시대로의 변혁을 꿈꿨던 소설들과 농촌의 목가적 분위기를 강조했던 소설들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던 소설이 바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아닌가 싶다.

동행
그렇다면 소설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 속 사건의 발단이 되는 시간적 개념의 의미를 지닌다. 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남다르게 엮어주는 인연의 매개체가 된다. 아울러 흐드러지게 펼쳐진 메밀밭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들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가난의 깊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봉평장 드팀전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의 인연이 정체를 드러내는 때도 산 허리에는 메밀꽃이 달빛에 숨이 막힐 정도로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 기막힌 동행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메밀꽃 필 무렵'의 시간 속으로 동행을 약속하고 있다.
 


그들의 동행이 슬픈 이유는 독자들은 알고 있지만 정작 소설 속 그들은 모르는 출생의 비밀 때문이다. 이 출생의 비밀에는 허생원과 동이 아니 당시 서민들의 녹녹치 않았던 삶이 투영되어 있다. 요즘 막장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된 출생의 비밀이야 머리카락 한 올(?)이면 끝난다지만 당시에야 가능할 리도 없었고 그들에게 놓여진 삶의 무게는 그 비밀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달빛만이 그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허생원과 동이의 고단했던 삶 속에는 봉평과 제천을 오갔던 '메밀꽃 필 무렵'의 추억이 각각 자리잡고 있었다. 허생원이 막난이 동이를 내치지 못했던 것도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허리까지 찬 개울을 건넜던 것도 각자의 아픈 추억이 하나의 연결고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나귀의 방울소리가 청정하게 들렸고 그들은 제천으로의 또다른 동행을 약속한다.

왼손잡이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를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동이가 나귀의 채찍을 들고 있던 왼손이었다. 눈이 어둡던 허생원이 허투루 보지 않았던 것도 바로 자신이 왼손잡이이기 때문이었다. 흔하디 흔한 오른손잡이보다 소설의 필연적 개연성을 위해서는 왼손잡이가 꼭 필요했겠지만 이 설정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감내의 시간들을 더욱 처절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준다. 작가도 이런 의도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우리사회에서 왼손잡이는 소수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상징한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다수의 오른손잡이와 다른 소수의 왼손잡이를 틀리다고 말한다. 분명 다를 뿐인데 밥상머리에서는 울며불며 오른손잡이로의 변신을 강요당해왔다. 분명 다를 뿐인데 우리사회는 '틀리다'며 그 흔한 배려와 아량을 왼손잡이에게만은 적용하지 않는다. 허생원도 왼손잡이라 각다귀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나귀를 놀리는 아이들을 쫓아보지만 돌아오는 건 놀림 뿐이다. 동이도 그랬으리라.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결국 허생원과 동이는 시대적 아픔과 차별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당시 서민들의 군상인지도 모른다. 허생원과 동이가 공유하고 있는 추억과 왼손잡이의 슬픔이 단순한 우연에 그칠 수도 있다. 즉 그들의 기막힌 동행은 허무한 결론으로 끝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또다른 동행을 약속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팍팍하고 고달픈 현실을 애써 극복하려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네 자화상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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