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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장례식장에 울려퍼진 메이데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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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북명의 『질소비료공장』/「분가꾸효오론」(1935.5)/창비사 펴냄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은 그가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1932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질소비료공장』은 연재 도중 일제의 검열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한국 프로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인정받아 일본이나 중국에 번역 소개되기도 했던 소설이다. 창비사에서 발굴 소개한 『질소비료공장』의 출처가 일본의「분가꾸효오론,文學評論」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방 후 이북명은 조선플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담했고 이 후 북한에서도 문화계 요직을 두루 거친 북한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일제의 사상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연재가 어떻게 일본에서는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채호석(1930년대 소설 전공)씨에 따르면 사회주의 운동도 식민지와 제국주의 본국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채호석씨에 따르면 『질소비료공장』의 원본은 없다고 한다. 이북명도 1935년 일본에서 번역되어 소개된 번역본을 해방 후에 다시 번역해 썼다고 하니 이보다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노동자 출신이 쓴 체험 소설

『질소비료공장』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저자 이북명 자신이 흥남비료공장의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마치 박노해 시인을 연상시킨다. 『공장신문』의 저자 김남천도 노동자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남천은 소설을 쓰기 위한 위장취업일뿐 그가 진정한 노동자였다고는 할 수 없다. 체험과 경험의 차이는 현실감과 현장감에서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질소비료공장』의 전개와 메세지는 공허하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늘 이상적으로 성공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북명이 노동자로 살면서 뼈저리게 체험한 현실인식이다. 반면 경험소설은 추상적인 현실에 작가 자신의 이상이 덧붙여지면서 현실과 괴리된 결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 노동현장의 구체적 묘사로 설득력을 한층 배가시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저자와의 동질감을 형성시켜 주고 저자의 의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정지했던 원심분리기가 기동을 시작하자 그는 침적조의 문을 들었다. 흥건하게 찼던 모액이 쏟아져 나왔다. 원심분리기가 이 모액을 받아 유산과 수분을 깡그리 제거하고 유안 비료를 내는 데 8분 내지 10분이 걸렸다. 상호는 눈부시게 회전하는 원심분리기를 응시한 채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질소비료공장』 중에서-

현장 노동자 출신이었던 이북명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질소비료공장』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한 노동자들의 자본가에 맞선 계급투쟁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시기 사회주의 계열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급투쟁은 민족주의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우선 질소비료공장의 소유는 일본 제국주의의 기업이다. 또 이 기업은 노동자들의 사상 선도에 이용하기 위해 일본 '키보우사'라는 종교단체에서 발간하는 <이즈미노하나>와 <키보우>라는 종교잡지를 식당에 비치해 두고 있다. 이 공장 노동자들의 '우울한 식당에 남아있지 말자' 라는 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질소비료공장의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인 셈이다. 


장례식장에 울려퍼진 '메이데이의 노래'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폐병에 걸려 직장에서 쫓겨난 문길의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연대가 불길처럼 타오르는 장면이다. 그동안 일본인 감독의 극악한 탄압 앞에서 숨죽이고 있던 질소비료공장 노동자들이 문길의 상여를 보면서 철문을 박차고 상여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 이 투쟁이 성공하지는 못한다. 이상주의에 그친 다른 카프 계열의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노동절에 맞춰 진행된 문길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선창한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 천지를 진동하는 메이데이를...'으로 시작하는 '메이데이의 노래'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철조망 안 노동자들의 합세로 우렁찬 합창으로 변한다. 

여기서 소설은 막을 내리지만 질소비료공장 노동자들에게 이 날의 합창은 비록 제국주의와 자본의 탄압이 아무리 극렬할지라도 노동자 스스로가 연대하면 그들과 맞설 수 있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북명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측의 탄압을 뚫고 결성한 N공장친목회 대표자회의가 삐라 형식으로 회사측에 항의한 요구조건이 80년 전과 오늘의 노동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무색해질 뿐이다.

첫째, 무단해고를 절대 반대한다.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둘째,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라.
셋째, 춘기 신체검사의 결과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지불하라.
넷째, 징계,처벌,감봉 제도를 철폐하라.
다섯째, 우리의 친목회 조직을 승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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