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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MB만 비껴간 코미디 풍자, 과연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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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05/창비사

1980
년대 KBS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 중에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비룡 그룹 임원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본 설정으로 한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 프로였다. 비룡 그룹 임원회의에는 몇 명의 정형화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회장(故김형곤),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회장 처남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버티고 있는 양이사(故양종철), 쓴소리만 해대는 그래서 늘 찬반신세인 엄이사(엄용수), 김회장 옆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만 울려대는 영혼없는 김이사(김학래). 마치 도때기 시장 같은 비룡 그룹의 임원회의는 김회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잘 되야 될텐데…”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이들이 쏟아내는 웃음 보따리는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던 많은 대중들에게 청량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코너는 중도에 폐지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중들은 이 코너를 단순히 어느 대기업의 임원 회의실로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의 학살로 정권을 잡고 온 가족이 동원되어 국민들의 혈세를 착복하고 있던 전두환에게 이 코너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시사풍자 개그의 원조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이어진 이후에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시사풍자 개그는 계속되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탓에 물태우로 묘사되기도 했다. 뒤이어 출현한 소위 ‘3김 시대에 권력자는 코미디와 개그 프로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가래 끓을 듯 갈라지는 김종필 전총리, 카랑카랑 쇳소리처럼 들리는 김영삼 전대통령,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김대중 전대통령, 코미디는 이들 권력자들을 희화화시키면서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이들을 흉내 낸 코미디언들은 그들만의 캐릭터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코미디의 권력에 대한 풍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주류의 위대한 승리로 평가되는 참여정부 시절 급기야 대통령은 코미디 소재를 뛰어넘어 비하의 대상으로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매체는 비판이 아닌 사돈의 팔촌까지 언급하며 대통령을 힘없는 권력자로 만들고 말았다. 언론은 각종 유언비어들을 진실로 둔갑시켜 버렸고 코미디 프로에서는 대통령을 나약하고 찌질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권력을 대하는 태도로만 본다면 대한민국 역사상 이 때만큼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코미디가 개그로 바뀌었고 주말 저녁 TV화면에서 대통령이 사라지고 말았다. 기껏해야 요즘 목소리만 등장하는 게 전부다. 대통령만 사라진 게 아니다. 현정부에 밉보인 연예인들도 같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살라고 말한다. TV 화면은 권력자의 입맛대로 편집된 그림들로 넘쳐난다. 말 한마디, 글 한 번 잘못 썼다가는 평범한 일상을 빼앗겨버리는 세상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제한적이나마 할 말은  하고 살았는데, 이런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20세기 한국소설 05]편 서평을 쓴답시고 시작한 글이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다. 풍자와 해학으로 대표되는 채만식과 김유정의 소설들로 편집된 [20세기 한국소설 05]는 웃음 속에 감춰진 슬픈 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잘못된 현실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할 때 풍자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채만식이 그렸던 무기력한 지식인은 당시 일제하 허구적인 문화정책의 산물이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채만식 자신도 무기력한 지식인의 길을 걷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록 해방 후 참회의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말이다.

김유정의 해학은 어떤가? 김유정의 소설을 읽으며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것도 웃음 뒤에 숨겨진 당시 조선민중의 궁핍한 생활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분노로 그려내는 눈물보다 웃음으로 그려내는 눈물이 더 긴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읽으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가냘프고 섬세한 문체와 달리 김유정은 <떠나가는 배>로 유명한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을 짝사랑해 수십 차례의 혈서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의 불꽃 같은 사랑 경험이 『봄봄』이나 『동백꽃』에 나오는 소박하고 순박한 사랑의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풍자와 해학이 있는 사회는 지극히 건전한 사회의 단면이다. 힘겨운 민중들에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고 잠재된 시민의식을 표출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 대상은 한정할 수 없다. 권력만 풍자와 해학의 대상에서 비껴간다면 그 권력은 언젠가 직접적인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권력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웃음을 잃어버린 사회, 웃음이 억압된 사회눈물은 분노가 된다.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조간신문을 보니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실렸더라. 아니 충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잘 훈련된 터라….

6월 발표를 앞두고 있는 발전권을 포함한 시민·정치·경제·문화적 권리 등 모든 인권의 증진과 보호라는 제목의 유엔 보고서에 2008년 촛불시위 이후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며 정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밝힌 개인들을 국제법에 부합하지 않는 국내 법규에 근거해 기소·처벌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다. 망신이다.

국가 브랜드 위원회? 그냥 웃지요.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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