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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삼십년 묵은 족제비의 정체가 사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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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찬(1931~2007년)의 <족제비>/1970년

 

하근찬 소설을 대표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역사와 민초일 것이다. 태평양전쟁에 강제징용되어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한국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의 수난을 다룬 <수난이대>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줄곧 사회고발적 소설을 써온 하근찬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민초들이 겪어야만 했던 수난과 고초를 때로는 진지한 시선으로 때로는 웃음이 묻어나는 글쓰기로 실감나게 그려냈다. 1970년 제7회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작인 <족제비> 또한 그의 뚜렷하고 일관된 주제의식을 보여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족제비>는 저자 하근찬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동원해 아이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세상을 해학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족제비>뿐만 아니라 저자의 일제 말기 사회상을 그려낸 작품들 대부분은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회고발적 소설에서 주인공을 아이로 설정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개 아이들은 철이 없다. 철이 없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상에 영합하기 위해 보여지는 세상에 덧칠을 하지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행동하는 특징이 있다. 결국 소설에서 아이의 등장은 그 순수함에 대비되어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 <족제비>의 배경은 해방되기 일년 전인 1944년 가을 경상도 어느 작은 농촌마을이다. 소설은 윤길이와 학섭이 그리고 일웅이라는 열살 남짓한 세 명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아이들은 노는 모습은 여느 주택가 골목길에서 보는 풍경 그대로다. 윤길이와 윤길이보다 두 살 많은 학섭이는 국민학교 5학년이고 일웅이는 6학년이다.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야자'하는 깨복쟁이 친구들이다. 그 중에서도 학섭이는 덩치도 덩치지만 어른들이나 할법한 휘파람을 멋지게 불어대는 골목대장이다. 윤길이는 이런 학섭이를 늘 동경하고 따라다닌다. 골목대장 학섭이의 말은 곧 법이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그날의 놀이를 결정하는 이도 학섭이었고 학섭이가 휘파람 한 번 부는 것으로 누구랄 것도 없이 놀이는 시작된다. 한 학년 위인 일웅이도 학섭이에게만은 꼼짝 못한다.

 

하루종일 논밭을 누비며 놀고 있는 이 아이들의 행동과 외모를 묘사한 첫 부분에서 독자들은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미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6학년생이 하나 있었다. 일웅이었다. 눈이 유달리 크고 목이 가늘고 길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한 학년 아래인 학섭이에게 꼼짝 못했다. 매사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곧잘 비위까지 맞추려 들었다. 찐 고구마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는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족제비>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맨발이었다. 그냥 맨발로 벼 밑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는 것이다. 그 시절 조선 농촌마을 풍경이 어디는 안 그랬을까. 학교를 갈 때도 짚신이나 게다짝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일웅이만은 달랐다. 일웅이만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것이다.

 

소설은 어느 시골마을에나 있는 전설 아닌 전설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호기심은 바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대나무숲이 우거진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저택에 살고 있는 하시모토라는 일본인과 대나무숲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 삼십년 묵은 족제비였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른들 누구도 하시모또와 족제비에 대해서 '카더라'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어느날 군의 공출을 피해 학섭이의 아버지 고생원이 하시모또 농장 담벼락 밑에 숨겨두었던 볏가마니가 발각되어 주재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나온 후 이게 모두 그 족제비가 현장을 파헤쳐놨기 때문이었다며 족제비를 잡기 위해 엉뚱한 행동을 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족제비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족제비의 정체는 다음 해 여름 그러니까 해방되고 이 마을에 살던 일본인들이 물러가던 날 또 하나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하시모또를 직접 보게 되면서 밝혀지게 된다. 베일을 벗은 하시모또의 외모는 이랬다.

 

유까따에 게다를 신고 어린애 걸음마처럼 자박자박 걷고 있었다. 키도 여느 사람의 어깨까지밖에 안 왔다. 훅 불면 넘어질 것 같은 늙은이었다. 얼른 보니 꼭 주먹만한 얼굴에 두 눈썹은 붓으로 답삭 먹을 묻혀놓은 듯 새까맸다. 턱수염은 밀어버렸는지, 처음부터 돋아나지 않았는지 맨송맨송했고, 입술 위에만 하얀 수염이 양쪽으로 가느다랗게 흐르고 있었다. -<족제비> 중에서-

 

 

짐작했으리라. 마을 사람들에게 특히 고생원에게 하시모또의 외모는 족제비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소설 <족제비>는 일제 강점기 말 일본인 지주에 의한 식량수탈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당시 조선농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일제 말기 일본은 부족한 전쟁물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식량이나 고철, 유기 등 각종 물자를 민간인에게서 강제 징발했다. 이것을 공출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특히 일본인 지주의 땅에서 고율의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지었던 당시 농민들에게 공출은 이중삼중의 고통일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매일같이 산에서 내려와 닭이며 가축들을 물고가고 애써 지은 곡식을 다 망쳐놓는 족제비의 특성을 하시모또라는 일본인과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일웅의 묘사에서 짐작했겠지만 일웅이의 아버지 농사를 짓는 농장이 아니라 지은 농사를 거두어들이는 농장이었던 하시모또 농장의 서기였던 것이다. 또 고생원이 숨겨놓은 볏가마니가 발각된 것도 일웅이 아버지의 소행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설 <족제비>는 해학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동네 아이들의 묘사라든가 '코생원', '콧구멍 생원', '구멍 생원'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고생원의 유별난 외모 묘사 등. 특히 정체가 밝혀진 하시모또의 인물 묘사는 압권이다.

 

그러나 사회고발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나 해학적 요소는 왜곡된 현실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농촌 현실이 지나치게 희화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근찬 소설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숱한 역사의 질곡을 견뎌온 민초들의 삶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승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하근찬이 단편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뚜렷한 주제의식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한 여인의 수난사를 다룬 첫 장편소설 <야호>에서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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