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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상처투성이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족의 해체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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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1975~) <부고>/2011

 

20년 연상의 중늙은이(무신)를 아내랍시고 데려온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형철, 이런 동생의 아내를 언니라고 불러야만 하는 미라. 게다가 미라의 앞에 나타난 무신의 전남편의 전부인의 딸과 또다시 재발한 동생 형철의 역마살까지.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은 이렇게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끝낸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충격이 너무 컷던 탓일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두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는 마치 내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 가족의 탄생은 그렇게 기존의 가족에 대한 관념을 여지없이 부셔버리고 만다. 

 

가족의 사전적 의미는 혼인이나 혈연 또는 입양의 유대로 맺어지며 단일가구를 형성하는 집단이다. 이런 가족의 구성요건은 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렇다면 영화 가족의 탄생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의문이 생긴다. 영화 가족의 탄생은 혈연관계로 한정하고 있는 기존의 가족에 대한 개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영화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가족의 사전적, 법적 의미를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그 상처를 서로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의 동아리 또한 가족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

 

김이설의 소설 <부고>도 영화 가족의 탄생만큼이나 다소 황당한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엄마의 부고를 알리는 엄마의 전화가 바로 그것이다. 도깨비의 장난도 아니고 이 무슨 황당한 설정인가 싶을 것이다. 당뇨로 투병생활을 하던 낳아준 엄마(생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키워준 엄마(양모)가 알려준 것이다. 그뿐이랴. 엄마가 죽기 전까지 양모는 생모의 병간호를 해왔다. 소설 <부고>는 각자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엮어지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다양한 형태의 대안가족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사회는 혈연관계에 대한 전통적 개념의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인정하면서 막상 나에게 닥쳐왔을 때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가족의 형태 중 대표적인 것이 동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나처럼 엄마가 둘인 재미교포 상준. 서로의 상처도 사랑으로 잊으며 동거를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니 둘에게 강요된 문화적 차이는 생각보다 크고 심각하다.

 

한국은 조금 다르다는 걸 알죠? 부모 입장에서는 과년한, 그러니까 나이가 많은 딸을 그저 동거하는 딸로 두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탄생을 반대하는 엄마(양모)지만 엄마와 아버지 또한 법적인 범주를 벗어난 가족의 형태를 구성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외도로 집을 나간 엄마(생모) 대신 어느 날 상대의 아들에게 양육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여자(양모)를 데려와 살고 있다. 그야말로 사회적 편견이 여전한 현실에서 나와 상준, 아버지와 여자는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씁쓸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으면 가족이다

 

불안한 가족의 탄생은  그만큼의 해체 가능성이 공존한다. 동거를 바라보는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준은 나도 알 수 없는 new life를 찾기를 바라며 떠나고 만다. 나의 뱃속에 있던 또 한 명의 가족이 있었다. 가족의 해체와 함께 빛도 보기 전에 사라져야 할 비운의 가족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여자는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말았다. 서로의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가족의 탄생은 해체라는 예고된 길을 걷고 만다.

 

혈연이라는 가족의 전통적 개념조차도 법적인 의미의 가족은 유지될지언정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상 가족 아닌 가족으로 살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는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가치를 강요받은 오빠는 이민의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가족이기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아버지의 혼외아들로부터 당한 성폭행, 나만 마음 속에 담아두면 된다는 아버지. 그렇게 상처는 곪아 문드러져만 간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족은 그렇게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상처를 곱씹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버지의 주검을 최초로 발견한 여자(양엄마)의 또 하나의 부고를 알린 전화에서 해체된 가족의 재결합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상처는 결국 혼자 품고 가야 할 숙명이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말하고 보듬을 수 있을 때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가족의 범주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 가족은 그렇게 규정하고 규제할 수 없는 사람들의 동아리가 아닐까.

 

너는 늘 혼자 방에서 책만 읽는 애였다. 밥 먹으라고 불러도 도통 단번에 나오질 않았지. 그래서 네가 책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서 살 줄은 몰랐다. 나는 그게 속상해. 그렇게 살지 마.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 있어.”

 

소설 <부고>에서 보여주는 가족 구성원들이 지닌 상처들은 다소 충격적인 장면도 있지만 결코 현실을 벗어난 가상의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처들을 보듬을 수 없는 전통적 개념의 가족이 변화된 개념의 가족과의 충돌을 보여준다. 다양한 가족의 출현에 걸맞지 않은 정책의 경직성이 소설 <부고>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간 갈등의 원인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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