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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젊은 박경리를 슬프게 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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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불신시대>/1957년

전쟁이 남기는 상처 중에 가장 치유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회적 관계로 묶어 주었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특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일컫는 한국전쟁은 수천년 동안 이어내려온 민족적 동질감을 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이 침투해 철저히 파괴해 버린 경우다. 결코 우선일 수 없는 이념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비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 '만무방'에서 어느 깊은 산골에 사는 촌부가 낮에는 태극기를 걸고 밤에는 인공기를 걸어야 했던 것처럼 생존을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덫에 스스로 갖혀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게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문학의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경리의 소설 <불신시대>는 이처럼 전쟁이 허물어버린 신뢰의 벽을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초기 작품이면서 자신의 체험적 소설로 알려진 <불신시대>는 전쟁의 상흔에 대한 리얼리즘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시인을 꿈꾸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소설가로 변신한 초기 작품인 탓도 있겠지만 단편소설이 가지는 분량의 한계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의 체험에 국한된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후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성장하게 된 박경리의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을 확립해 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박경리를 슬프게 했던 전쟁이 남긴 불신의 벽은 어떤 모습들이었을까.


소설은 한국전쟁 중에 남편과 자식을 잃어버린 진영이라는 여인이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진영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의 불신이다. 한편 남편과 자식이 죽던 날 진영의 머릿 속을 강타하는 하나의 장면은 전쟁의 잔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년병은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 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것이다. -<불신시대> 중에서-

진영이 체험하는 불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또 불신의 근원은 다름아닌 황금만능주의다. 전후 복구작업 중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물질만능의 이런 현실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데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비정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이다. 

진영의 눈에 들어온 첫번째 불신의 벽은 먼 친척이기도 한 갈월동 아줌마다. 진영이 신앙으로 의지하려 했지만 결국 사기꾼과 다름없는 인물이다. 또 아들 문수를 살리기 위해 찾아갔던 병원은 온통 비리의 온상이다. 사람 목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Y병원은 주사약의 분량을 속이고 S병원은 건달이 의사 노릇까지 한다. H병원은 빈 외제약병을 내다팔고 전혀 위생에 신경쓰지도 않는다. 결국 아들을 잃게 된 진영은 사회에 대한 불신 키워가게 된다. 이런 진영에게 생존 자체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 현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종교였다.


삶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종교의 배금주의적 타락은 진영에게 삶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녀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진영이 성당에서 겪게 되는 잠자리채처럼 머리 위에서 돌아다니는 무언의 현금 강요와 시주하러 온 여승의 쌀을 파는 행위가 그것이다. 게다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마련한 천도제에서 돈의 액수에 따라 명목을 비는 진정성의 강도가 결정되고 만다.

세상으로부터 기만당한 진영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전쟁이 남긴 대표적인 경향 중의 하나인 허무주의가 배금주의에서 비롯됨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이 갖는 의미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이 현실에 순응해 버리는 소극적 태도가 아닌 불신의 벽을 깨고 홀로 일어서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절에 보관돼 있던 아들의 위패를 태워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여성으로의 변신을 보여준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어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다. -<불신시대> 중에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지와 해결책을 모색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내면적 결의를 다짐으로써 여성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점은 여타 전후소설들이 보여주지 못한 특징이라 하겠다. 
 
작가 박경리는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과 같은 현실 비판적인 소설들을 발표하게 된다. 박경리가 <불신시대> 이후 발표한 소설들은 어쩌면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토지>를 내놓기 위한 몸풀기는 아니었을까. 그녀를 슬프게 한 사회 구석구석의 냉혹한 현실들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댐으로써 인간과 환경에 대한 집요한 애착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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