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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돌로 위장한 황금을 내친 오랜 벗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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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숙의 <전황당인보기>/1955년

석운(石雲) 이경수(李慶秀)가 선비로서 야인(野人) 시절이랄 것 같으면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무엇이든 들고 가서, 매화옥(梅花屋) 뜰 한가운데 국화주(菊花酒) 부일배로 한담소일하면 옛 정리 그에 더할 것 없으련만, 석운 벼슬을 했으니 지(紙), 필(筆), 묵(墨), 연(硯)을 즐길 여가가 있을 것 같질 않았다. -<전황당인보기> 중에서-

정한숙의 소설 <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는 이런 고풍스런 문체로 시작한다. 또 일상에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꽤 등장해 뜻하지 않게 슬로우 리딩을 하게 된다. 인장(印章), 화유석(花乳石), 포자(布字), 전황(田黃), 아운(雅韻), 고졸(古拙), 참지('한지'의 사투리)……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고 쉬운 말로 요약하자면 수하인(水河人) 강명진은 관직에 오른 오랜 벗, 석운 이경수에게 기념이 될만한 것을 선물하고 싶어서 동대문 시장 뒷골목에서 우연히 구한 돌에 이경수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선물한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도장은 어느 도장방 주인을 통해 다시 강명진의 손에 들어온다. 이 일을 계기로 강명진이 느끼는 우정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소회를 담담한 문체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짦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사전을 몇 번이고 뒤적여보는 또다른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단어는 강명진이 이경수에게 선물한 인장의 재료 전황석이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기암괴석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10억원에 낙찰된 돌이 전황석이라는 뉴스를 검색하고는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돌이길래 황금보다 비싸단 말인가! 전황석은 중국인들의 보배라 부르는 수산석의 일종으로 인장 재료 중 최고로 꼽히는 돌이라고 한다. 소설에도 전황석의 가치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있다.

세 개의 돌을 움켜쥔 수하인은 말할 수 없는 흥분이 손끝에 떠오름을 참을 수 없다. … 돌의 가치를 알아서 부르는 값은 물론 아니겠지만, 한 개에 이백환 꼴로 육백 환만 내라는 것을 달라는 대로 치러준 수하인은, 도야지 품에서 진주를 구한 것 같이 기뻤다. -<전황당인보기> 중에서- 
 


속세의 물욕에 찌든 내가 느끼는 감흥은 단순했다. 이런 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이경수도 한심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거부당한 강명진의 서운함은 얼마나 컸을까. 과연 그랬을까. 요즘 말로 하면 '인장 명장'이라 할 수 있는 강명진의 장인정신과 예술혼을 너무 무시한 처사다. 그렇다면 저자가 강명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저자의 대표작이기도 한 <전황당인보기>는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처럼 예술혼이 깃든 장인정신과 함께 현실에 대한 소극적인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인장을 선물받은 이경수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전황석의 가치를 알리 없는 그는 한때 가장 친한 벗이었던 강명진의 선물을 도장쟁이의 고리타분한 그것쯤으로 치부하고 만다. 바로 지식인의 속물근성이다.

"격이 틀려도 이만저만해야지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별사람 다 보았지요."
"무슨?"
석운의 말끝엔 자기도 의식 못하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이게 뭐겠수? 돌조각에다 도장을 파갖고 벼슬한 기념으로 선살하다니…"

사라지는 옛 것에 대한 아쉬움이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지만 좀 더 구체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관직에 오른 친구의 속물근성을 통해 전통적 가치에 대한 소중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옛 것을 지킴으로서 선비로서의 면모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셈이다. 

한편 옛 것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소설 전편에 흐르는 서정적 정서로 마무리된다. 강명진은 참지 한 권에다 그동안 자신이 만든 인장을 기억에 떠오르는대로 연대순으로 찍었다. 물론 전황석 한 방도 맨 나중에 찍었다. 그의 곁을 평생 지켜준 또 그의 예술을 늘 지지해준 기생 산홍이와의 함께 인보(印譜)를 만들고 표지에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를 쓰는 마지막 장면은 장인의 예술혼이 격하지 않은 담담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어 한 장인의 예술에 대한 집념에 애절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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