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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봉평 메밀밭과 하얼빈 카타이스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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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합이빈>/「문장」19호(1940.10)

영화 보기를 좋아했고, 도시의 정서를 사랑하고, 깨끗한 린넨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서 예쁜 잔에 커피를 마시고, 버터를 좋아했던 사람 바로 작가 이효석을 두고 한 말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메밀꽃 필 무렵>이 깊이 각인된 까닭에 서구적 취향을 즐겼다는 이효석을 선뜻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설이 작가 상상력의 발로라지만 작가 자신의 삶이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작품을 대하면서 그 감동을 봄눈 녹듯 기억 속에서 지워야만 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풍경의 묘사가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효석의 소설 <합이빈>이 그렇다.

'합이빈()'은 중국의 도시 하얼빈을 한자식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최근 '빙등제'로 세계적인 겨울 관광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거니와 하얼빈은 중국에서도 가장 이국적인 풍취가 남아있는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간 기착지이고 20세기 초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의 군사기지였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뒤에는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함으로써 러시아식 벽돌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효석의 소설 <합이빈>은 자신에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이국적인 하얼빈의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얼빈 카타이스카야 거리에 있는 캬바레 판타지아에서 만난 쇼걸 유라와 시내를 거닐며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 속에서 허무주의자로 변모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또 그게 시대적 상황이었건 일상을 관통하는 표면적 변화였건 상실감은 한 지식인이 이념의 변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실제로 이효석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중국 등을 여행했으며 그 여행을 토대로 <합이빈>을 집필했다고 한다. 소설의 배경만 봉평 메밀밭에서 하얼빈 카타이스카야 거리로 바뀌었을 뿐 <메밀꽃 필 무렵>과 <합이빈>의 지향점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유라, 리나, 스테판이라는 이름의 등장인물과 뽀이, 캬바레 판타지아, 러시아 수프, 빵, 커피, 차이코쁘스키 등의 단어들은 <메밀꽃 필 무렵>의 동이, 허생원, 드팀전, 장돌뱅이 등 향토적 단어들과는 한 작가의 소설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작가 이효석의 서구지향적 의식은 봉평 메밀밭을 거닐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또렷한 주의와 목적이 없이 다만 하염없이 그 어지럽게 움직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동안에 번번이 슬퍼져감을 느낀다. 이유를 똑똑히 가리킬 수 없는 근심이 눈시울에 서러워진다. 인간생활은 또 공연히 근심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합이빈> 중에서-

조선에서 동이와 허생원의 존재는 하얼빈 캬바레 판타지아에서 만난 유라와 스테판으로 이어진다. 결코 명예롭지 못한 니이싸(사창가 정도가 아닐까 한다)  출신의 유라와 고향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한 차삯을 벌기 위해 캬바레 화장실에서 일하고 있는 뽀이 스테판. 동이와 허생원, 유라와 스테판은 시대와 현실의 이방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주인공 '나'는 유라와 스테판이 부녀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동이와 허생원의 관계처럼,

또 흐드러진 봉평 메밀밭의 풍경은 카타이스카야 거리에 있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사관으로 연결된다. 나무와 화초가 화려한 프랑스 영사관과 새빨간 샐비어가 한창 찬란하게 피어있는 네덜란드 영사관, 아름답게 표현될수록 절망과 허무의 깊이는 커져만 가는 것일까? 흐드러진 메밀밭도 꽃이 아름답게 핀 영사관도 식민지 땅이요, 그 속에는 고단한 삶을 버텨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귀향'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이 있다.

또 <합이빈>은 한때 동반작가로 활동했던 이효석의 심경변화를 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가 맹렬한 사회주의자가 아닌 까닭에 전향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일제의 사상탄압과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살육을 지켜보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변혁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리고 회의주의자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따위 옅은 설명보다두 내가 알구 싶은 건 창조의 진의-무슨 까닭으로 하필 현재의 이 우연한 결정이 있게 되었는가-현재가 이미 우연일 때 현재와 다른 우연의 결정을 생각할 수 없을까-...다만 우연한 기회로 말미암아 다르게 결정된 까닭에 지금의 이 머리, 이 행길로 변한 것이 아닐까..." -<합이빈> 중에서-

'그따위 옅은 설명'이란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의 발전 단계, 즉 진화와 필연의 법칙을 의미한다. 이효석의 소설 <합이빈>은 결국 동일한 지향점에도 불구하고 <메밀꽃 필 무렵>의 향토적 어휘와 스토리에 매몰된 나머지 짧은 소설을 수차례 반복해서 읽어야만 하는 수고로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의 등식관계를 한꺼풀 벗기고 나면 저자가 느끼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상실감과 그 상실감으로 인해 잉태되는 회의주의적 세계관을 보다 쉽게 엿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참 무섭다. 봉평 메밀밭을 지나는 허생원의 등짐 한켠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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