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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지식인이라고 다 지성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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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신동아」39호(1935.1)


<김강사와 T교수>가 발표된 1935년 식민지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일제의 사상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카프 맹원에 대한 검거 열풍이 있었고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조선의 전통적 가치관은 황국신민의 지위를 강요받고 있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많은 지식인들 특히 문학인들은 조선 청년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데 그들의 지식을 아낌없이 동원하곤 했다. 자발적이었건, 강요되었건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에는 지식인만 넘쳐날 뿐 지성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국이 되고 말았다.

<김강사와 T교수>의 저자 유진오가 문학인보다 정치인으로 더 기억되는 데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문학에 심정적 지지를 보냈던 동반작가로도 활동했던 유진오는 1939년 잡지「삼천리」에 중일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사설을 발표한 이후 일본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조선 총독부의 각종 어용단체에 가입해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했고 그의 이런 이력으로 해방 이후 새 문학단체 가입이 거부되면서 문학인의 길을 접고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진오의 대표작 <김강사와 T교수>는 그가 변신 아니 변절을 선택하기까지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뇌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어쨌든 그는 변절했다. 그의 문학적 성과를 폄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변절하기까지 주인공 김만필이 그랬던 것처럼 숱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음을 인정해 주는 아량(?)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김강사와 T교수>는 S전문학교 시간강사로 부임된 김만필이 현실과 타협해 가는 과정과 그 와중에 겪어야만 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한 때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지만 오랜 룸펜 신세로 삶을 무기력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강사가 시간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으로 타협을 선택할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갈지 고민하게 된다. 김강사의 대척점에는 T교수가 있다. T교수는 아첨이라는 형식을 빌어 적극적으로 현실과 타협해 가는 인물이다. T교수의 용의주도한 친절과 보이지 않는 압박을 통해 김만필은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인물이 되어간다. 

지식계급이란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어떤 자는 수많은 인격 중에서 자기의 정말 인격을 명확하게 쥐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그 수많은 인격에 현황해 끝끝내는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자기는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인가? -<김강사와 T교수>중에서

감강사와 T교수 사이에는 스스끼라는 학생이 있다.  김강사의 고민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인물이다. T교수의 세작일 수도 있고 김강사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끼의 정체에 대한 확신이 없는 김강사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데 급급한다. 결국 김강사는 현실을 선택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현실에는 그가 헤처나가야 할 또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강사와 T교수>에서 김만필 주변을 둘러싸고 김만필의 갈등과 고민을 유발하는 이들은 모두 일본인이다. T교수, H과장, 교장과 스스끼. 유진오가 친일로 돌아서기 전 최후의 고민을 김만필에게 투영시킨 것 같아 뒷맛이 여간 개운하지 않다.

최근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국책사업에 대학교수들이 대거 참여해 사업의 정당성을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다.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들은 '지성인'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된다. 그러나 그들은 현학과 허세만 넘쳐나는 지식인일뿐 결코 지성인이 될 수 없다. 이들 중에는 과거의 신념과 양심을 권력에 팔아버린 장사치들도 상당수다. 김만필이 그랬던 것처럼...

지식인은 흔하디 흔한 기성품처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인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샤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이 희생될 때 묵인하지 않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스스로 선택한 험난한 가시밭길을 당당히 걸어갈 줄 아는 사람이 곧 지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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