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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금지된 사랑과 실천하지 못했던 지식인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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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1907~1942)<산협>/「춘추」4(1941.5)

 

혹자는 이효석의 작품 중 세 편을 골라 영서 삼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묶기도 한다. 이효석의 고향인 강원도 평창을 비롯해 영서지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일컫는 말일 게다. ‘영서 삼부작 <메밀꽃 필 무렵>(1936), <개살구>(1937), <산협>(1941)으로 이 소설들에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 고향과 핏줄과 근대화를 수용하지 못한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일제의 사상탄압과 위선적 문화정책이 시작되던 시기라는 점과 동시에 이효석의 말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효석은 말년에 왜 그토록 향토적 묘사에 집착하였을까? 사실 이효석은 대학 졸업 후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총독부 검열계에 취직할 만큼 현실인식이 투철하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유진오와 함께 동반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꼽힌다. 어쩌면 이효석은 당시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수용했고 서구적 삶을 즐겼다. 그가 했던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았을지 싶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고민보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고민을 바라보는 이효석 자신이 혼란스러웠을 테고 그 종착지로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1941년 발표된 소설 <산협>은 근대화의 바람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두메 산골 사람들 이야기다. 원주 땅 문막에서 삼백 리나 떨어져 있고 양구덤이를 넘고 횡성벌판을 지나 더딘 소를 몰고는 꼬박 나흘이나 걸리는 산중 마을이다. 이 마을은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일부다처제가 공공연하게 인정되는 사회다.

 

양구덤이를 넘는 데만도 너끈히 하루가 걸리는 데다가 꿈틀꿈틀 구부러들어가는 무인지경의 영은 깊고 험준해서 울창한 참나무숲에서는 대낮에도 도적이 났다. 썩은 아름드리 나무가 정정히 쓰러져 있는 개울가의 검게 탄 자리는 도적이 소를 잡아먹은 곳이라고 행인들은 무시무시해서 머리털을 솟구면서 수군거렸다. -<산협> 중에서-

 

 

 

저자는 산골 마을의 전통적인 삶을 지켜주기 위해 다소 충격적인 소재를 끌어들인다. 바로 금지된 사랑이다. 주인공 공재도는 마을에서 부러울 것 없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식이 없다. 아니 아들이 없다. 공재도는 어느날 소금을 사러 문막에 나갔다가 원주집이라는 일색의 첩을 들인다. 자연 본처와 첩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바라보고 있던 조카 증근은 첩에게 둘소(새끼를 낳지 못하는 소)라 비아냥거림을 받는 백모를 지켜주고 싶었다. 어찌됐건 공재도는 본처와 첩 둘이 임신을 하는 횡재를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원주집은 전남편 대장장이의 아이를, 본처 송씨는 조카 증근의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전통을 잇기 위해 불륜까지 마다 않는 고향이라도 작가 이효석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까?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개화의 물을 먹은 원주집을 전근대적 문화에 적응시키지 못하고 다시 전남편에게 뺏겨버리는 장면에서 저자가 그리는 고향과 그 고향에 대한 열망을 짐작할 수 있다.

 

<합이빈>에서는 저자 자신에게 가해진 외부적 압력에 의해 동반작가로서 가졌던 사회주의에 대한 소신(?)이 변하면서 회의주의자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작가생활 후기에 보여주었던 향토적 경향은 단순히 당시 식민지 민중의 궁핍한 삶을 묘사했다는 평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당시 지식인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현실과 주변환경의 압박으로 실천적이지 못했던 지식인의 간극을 이데올로기 해체라는 방법으로 메우지 않았을까?

 

금지된 사랑이 있을지언정 근대화와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농촌의 풍경과 귀향에의 열망은 근대화가 몰고 온 왜곡된 현실을 외면하고자 했던 어느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는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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