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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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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모순, 백화가 죽었다 양건식의 /1918년 올해는 전태일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평화시장 봉재공장 재봉사였던 그는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자결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대한민국 노동자의 권리와 삶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글쎄... 대한민국 천만 노동자는 경제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다는 권력과 자본의 추임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저임금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가 수백만이고 살을 애이는 북풍한설에도 차가운 아스팔트로 내몰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재벌가 어떤 이는 백주대낮에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에게 '매값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단다. 사회주..
타협을 거부한 지식인의 핍박, 결국 親日로 돌아서다 현상윤의 /1917년 1992년을 잊지 못한다. 그해 총선이 있었고 대선이 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성인이 되어 행사할 수 있는 투표라는 행위를 하게 되었다. 투표뿐만 아니라 직접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경험까지 했다. 나는 당시 백기완 대통령 후보와 민중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물론 선배의 권유도 있었지만 소위 전교조 1세대인 나로서는 이미 고등학교 때 희미하게나마 현실에 눈을 떴던 것 같다. 그 당시 선거운동 참여도 나름대로는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기까지는 고민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선배들은 민중세력의 정치세력화를 두고 직접 참여하자는 쪽과 보수야당의 비판적지지를 통해 때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
김동인의 <배따라기> 아내와 동생의 불륜? 그는 왜 배따라기를 불렀을까? 김동인/배따라기/1921년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 1인 프로젝트 그룹 배따라기의 이다. 배따라기의 유일한 멤버는 이혜민이다. 왜 하필 그는 1인 프로젝트 그룹 이름을 '배따라기'라 했을까? 가수 이혜민은 몰라도 그가 만든 꽤 유명한 대중가요들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이 의문을 해결했다. , , , , , , ...가수라는 직업적 의미와 사랑을 갈구하는 그리움이 표현된 가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그룹명이다. '배따라기'는 평안도 민요의 하나로 '배를 떠나 보내며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라고 한다. 원래 배따라기는 전국 해안 지방마다 널리 퍼져있어 뱃사람들의 고달픈 생활을 노래했다..
1,000만 영화 [해운대]의 모티브가 됐던 책 수필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수필·피천득 지음·범우사 펴냄 오래 전 가을 춘천 영랑호에 간 적이 있다. 영랑호가 목적은 아니었고 설악산 여행중 우연히 들렀는데 그 곳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다. 붉게 이글거리던 가을놀을 빼앗은 영랑호는 나그네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누군가 좁쌀 만한 돌이라도 던져 파장을 일으켰다면 호되게 꾸짖어줄만큼 세상의 소음을 잔잔한 수면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을 때면 그 때 영랑호 한 켠에서 바라봤던 해질녘 호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수필이라서일까? 아니면 수필의 색깔이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피천득의 [수필]은 문학 장르로서의 ..
혈의 누, 이인직 그는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이인직(1862~1916)의 /「만세보」연재(1906.7.22~10.10) 신소설이라고 하면 20세기 초에 등장한 고대소설과 현대소설의 가교 역할을 했던 소설을 총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최초의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를 꼽고 있다. 그러나 뼛 속까지 일본인이었던 그를 우리는 ‘신소설의 선구자’ 정도로만 알아왔다. 추억해 보건데 최소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는 이인직을 개화사상과 자유연애를 소설로 설파한 위대한 개화사상가로 배워왔다. 어쩌면 해방 65주년을 앞둔 오늘까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그의 친일행보가 문학사적 업적에 가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사회가 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인직의 사상이 가장 짙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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