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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이래도 '엿 먹어라'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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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부터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원서 접수가 시작됐다. 올해 수학능력시험은 11월 8일에 치러진다. 필자는 학력고사 세대다. 원하는 대학에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학력고사 당일에는 해당 대학에서 직접 시험을 치렀다. 낙방의 쓴맛을 본 수험생들에게는 후기대학 입시라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수험생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처럼 느껴질 시간이다.

 

학력고사 세대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그 전형방법이 낯설기도 하고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자주 바뀌는 전형방법으로 수험생들이 느끼는 혼란은 주변에서 보는 그런 혼란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20년이 훌쩍 지나버린 세월만큼이나 교육 정책도 오락가락 하고 있으니 참 한심할 노릇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으니 바로 대학입시 당일의 풍경일 것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시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축제를 여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수험장 담벼락에 늘어진 엿을 붙이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수능 풍경일 것이다. 엿처럼 떡 하니 붙기를 바라는 학부모들을 볼라치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곤 한다. 

 

 

요즘이야 수능날 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엿이지만 필자가 어릴 적만 해도 엿은 흔치않은 먹거리 중 하나였다. 비단 먹거리에 그치지 않았다. 엿을 두 동강이 낸 다음 재빠르게 잘려진 면을 힘껏 불어 누가 엿에 더 큰 구멍을 만들었냐로 내기를 하는 '엿치기'라는 놀이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구세대들에게는 추억이 담겨있고, 신세대들에게는 간절한 소망이기도 한 엿이 때로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니 너무 일상화 된 나머지 엿은 오히려 부정적 의미가 더 보편화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엿 먹어라'. 일상에서 가장 흔히 쓰는 비속어가 아닐까 싶다. 엿을 대하는 이런 이중적 태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엿 먹어라'의 유래는 아이러니 하게도 대학입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다. 사연은 이렇다.

 

1964년 12월 7일에 1965학년도 서울지역 전기 중학입학시험이 치러졌다. 당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가 문제가 되었는데 엿을 만드는 과정을 묻는 문제에서 서울시공동출제위원회가 제시한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수험생과 학부모들에 의해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시공동출제위원회는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반발이 거세지면서 소위 말하는 '무즙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서울시공동출제위원회는 문제가 되었던 자연 과목 18번 문항을 백지화하고 모두 정답 처리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아스타아제'를 답으로 쓴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단 1점으로 당락이 갈리는 시험에서 해당 문제를 백지화해 버리면 '디아스타아제'를 쓴 수험생들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본 셈이었으니 이들의 반발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사태 반전으로 당황한 서울시공동출제위원회는 다시 입장을 번복해 원래대로 '디아스타아제'만을 정답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는 합격자 발표를 강행하고 말았다. 

 

이쯤에서 사태가 봉합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 '무즙'을 답으로 표시했다 불합격한 수험생들이 학교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학부모들도 가세해 서울시 교육위원회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법원은 다음 해 3월 30일 '자연 18번 문제는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정원외 전입학'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소송을 낸 수험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엿 먹어라'라는 비속어는 당시 학부모들이 시위하는 과정에서 '무즙'으로 만든 엿을 가져와 서울시 교육감에게 "무즙으로 만든 엿 먹어봐라"라고 항의했던 게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 신통치 않다. '엿 먹어라'라는 말이 그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하게 됐다면 모르겠지만 그 전에도 대중들 사이에서는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즙 파동'이 특정 언어의 유래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엿 먹어라'라는 말과 당시 사태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엿 먹어라'라는 비속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도서출판 범우사에서 매월 발행하는 「책과 인생」5월호에는 '엿 먹어라'의 유래에 관한 명쾌한 해석이 실려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충격적이면서도 조금은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 신체의 특정부위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말이다. 국어연구가 미승우의 주장이다. 저자는 우선 대학가 은어로써의 '엿 먹어라'에 관한 또 다른 유래를 소개한다. 어느 한글학자의 글이라는데 검색해 보니 박갑수의 <국어의 표현과 순화론>이 그 출처였다. 

 

따라서, '마돈나'란 '마시고 돈 내고 나가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친구는 상대방에게 반격을 가해, 엿을 물고 입다물 듯, 쓸데없는 말 말고 입 다물라고 '엿 먹어라'라고 한 것이다. -<국어이 표현과 순화론> 중에서-

 

저자는 이 글이 대학가 은어로써의 '엿 먹어라'를 소개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엿 먹어라'가 대학가의 은어에서 처음 생긴 말인 줄 알고 썼다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국어연구가인 저자가 밝히는 '엿 먹어라'의 어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엿 먹어라'의 어원이 우리나라의 전통 예능 집단인 남사당패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우리도 익히 알다시피 남사당패들은 외부인과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불편이 없을 만큼 풍부한 은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남사당패의 은어 중에 '엿'이 있고 그들이 쓰는 말에 '엿 먹어라'가 있다고 한다. 즉 '엿 먹어라'의 유래는 대학가 은어나 '무즙 파동'보다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남사당패의 은어인 '엿'은 '뽁'과 함께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엿 먹어라'는 바로 '○○ 먹어라'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남사당패의 은어에서 기가 막힌 말을 찾은 것으로 알고 썼을 것이 분명한데, 그 뜻을 알고 보니 민망하기 그지 없다. 저자는 또 상소리로 흔히 썼던 '○ 먹어라'가 말하기도 민망하고 해서 거부감이 적고 듣기에도 괜찮으리라고 해서 '엿'으로 바꿔 쓴 것으로 주장한다. 어쨌거나 어느 경우든 점잖치 못한 말이기는 매한가지다. 

 

비속어, 상소리, 은어도 우리 일상에서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물론 아름다운 말을 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없앤다고 해서 바로 없어지지 않는 게 바로 언어다. 그래도 우리가 쓰는 말의 정확한 의미나 어원을 한번 쯤 되새겨 보는 것도 언어 순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솔직히 '엿 먹어라'의 유래를 알고나니 선뜻 내뱉기가 어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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