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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세 친구의 기막힌 이별과 어색한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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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의 <3의 국경>/1985

                                                    

문순태의 <3의 국경>은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리게 한다.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한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현실에 눈을 뜨게 된 명준에게 남한의 현실은 타락했고 인간적 확증을 확신하며 살 수 없는 땅에 불과했다. 결국 인천에서 배를 얻어 타고 월북을 감행한 명준은 북한에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노동신문 기자가 된다. 그러나 북한 사회 또한 그에게는 기계적 관료 사회에 불과할 뿐 인간이 인간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중에 포로가 되고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게 된다. 최인훈의 <광장>은 명준이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딸의 환영을 보고 바다에 자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문순태의 <3의 국경>에서 <광장>의 명준과 같은 선택을 한 인물이 있다. 한국전쟁 중포로가 된 이기철은 1953 618일 영시를 기해 단행된 반공포로 석방에서 제3국 인도행을 선택하고는 훌쩍 떠나버린다. 이데올로기로 인해 동족간 무차별적 살상을 강요했던 한국전쟁의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의 명준이 자살하지 않고 제3국인 인도에 정착하고 살았다면 수십 년이 지나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지만 <3의 국경> <광장>의 뒷이야기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명준과 이기철의 비극은 시간으로 치유가 가능했을까.

 

세 친구의 기막힌 이별

 

이념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강요하고 그들의 순수한 선택에 이데올로기를 덧씌워 버린다는 것이다. 남한을 선택했건, 북한을 선택했건 아니면 제3국을 선택했건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이념이 아닌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만이 존재할 뿐인데도 말이다. <3의 국경>에서 죽마고우인 박동실과 이기철, 배출도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함경남도 부전호 근처 솔뫼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세 친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나란히 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부상당한 이기철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박동실과 배출도는 결국 반공포로가 되고 반공포로 석방이 발표되던 날 그들의 운명은 서로 엇갈리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린 반공포로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세 친구에게 이데올로기는 그저 먼 나라 얘기일 뿐 그저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반공포로들 사이에서 이념의 선택은 폭력을 낳고 서로가 서로에게 회색분자라는 멍에를 덧씌우고 만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뭔지 잘 모릅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것도 아니오, 끌려와서 살기 위해 싸운 것뿐이오.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제발 우리에게 공산주의자가 되어라, 민주주의자가 되어라 하고 강용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당신들이 싫소.” -<3의 국경> 중에서-

 

결국 박동실은 오대 독자인 아버지의 요구로 남한에 남게 되고 배출도는 아내가 있는 북한을 선택한다. 포로 수용소에서의 이념 논쟁에 환멸을 느낀 이기철은 제3국인 인도행을 선택한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선택은 이념이 아닌 마음에서 또는 양심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진정한 자유란 이런 게 아니겠는가. 이후 세상이 이들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중립국으로 구분했을 뿐이다. 자유에 대한 본질적 개념은 남한에 정착한 박동실의 반공강연과 박동실의 아들 박동수가 취직한 일본 화물상선측이 남지나해에서 만난 베트남의 난민선 처리에 대한 에피소드로 형상화된다.

 

이따금 근동의 학교에 초청되어 <나는 왜 자유를 택하였는가>라는 주제로 연설 아닌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연설을 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곤혹스러움을 느꼈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배신행위임을 알고 고민하였다. 기실 그는 자유로움 때문에 남쪽에 남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택한 것은 오직 나약한 삶 자체뿐이었다. -<3의 국경> 중에서-

 

끝나지 않은 비극

 

32년 만에 만난 박동실과 이기철 사이에는 어색한 대화만이 오고 갈 뿐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비록 강요된 이데올로기였지만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체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단 한 번뿐인 선택이 있은 후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두 번째의 선택은 허용되지 않는다. 북을 선택하면 그쪽에 갇히게 되고, 남을 선택하면 그쪽에 갇히게 된다. 나는 단 한 번만의 선택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거야. 한 번만의 선택은 자유가 아니지 -<3의 국경> 중에서-

 

북한으로 갔던 배출도와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이산가족찾기 방송에서 배출도의 아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전쟁 중에 낳은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던 배출도의 아내는 박동수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게다가 배출도를 대신한 배출도 아들과 박동실, 이기철의 만남은 이기철이 미국 시민권자를 꿈꾸며 미국 유학중이 이기철의 아들이 발리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편지 한 장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떠나버림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한다.

 

요즘은 자유라는 말이 특정 세력의 전유물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강요받지 않는 선택, 양심의 자유가 그 본질이다. 한편 국제사회의 탈냉전 흐름과 다릴 우리사회는 최근 들어 박물관의 박제가 되어버린 냉전과 이데올로기를 신주단지 받들 듯 하는 세력들에 의해 대립과 반목이 격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보도에 따르면 매년 4,000명에 가까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인들이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이산가족의 노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정부정책은 오히려 강요된 비극에 비극을 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한심하고 답답할 뿐이다. 소설 속 박동실의 생각처럼 진정한 자유란 가고 싶은 고향에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있고 싶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바로 생명 그 자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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