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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기름 보일러 때문에 불효자의 겨울은 더디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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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의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2011

                                                    

어느 시골 농가 주름이 깊게 패인 아버지가 소를 몰고 들어온다. 어머니는 맨손으로 두껍게 언 얼음을 깨느라 분주하다. 방에 들어온 노부부는 아랫목에 손을 녹이고는 짧은 대화를 나눈다.

에이그, 방이 왜 이래

이 추운데 애들 고생이나 안하는지,

다시 눈쌓인 농가가 화면에 잡히고 자막과 함께 며느리로 보이는 어느 여인의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여보, 아버님 댁에 XX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1990년대 어느 보일러 전문기업의 TV광고는 이렇게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카피로 인기를 끌었다. 이 광고는 따뜻한 사회 만들기라는 공익적 성격을 띠면서 다양하게 진화해갔다. 자사 제품의 홍보 대신 전통적 윤리의식을 강조한 카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광고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내재된 효 의식을 자극하면서 보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양자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XX보일러 때문에 이 광고를 접한 소비자들은 알게 모르게 효자불효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부모님 집에 보일러를 놓아드리는 것이 효의 기준은 아니지만 광고에 몰입하는 순간 감성의 저 끝자락에서는 몸에 밴 전통적 가치들이 꿈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어찌됐건 이 광고는 공익과 이윤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성공적으로 진화해 간다.

김종광의 소설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는 우연한 사건을 접하면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을 통해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광고 속 XX보일러 대신 소설에서는 스파크 반신욕조기가 등장해서 주인공의 감성을 흔들어 놓는다.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는 완벽하리만큼 소설적 구성에 충실한 작품이다.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전개에 이어 등장인물들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지점을 지나 소설 전체의 주제를 짐작케 하는 결말까지 철저한 교과서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형식에 충실한 소설의 구성은 일반 독자들이 단편소설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소설의 소재는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면서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봤을 그런 갈등이다. 단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지만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읽는 이의 잠깐 동안 호흡을 멎게 한다.

 

어느 날 친척 아주머니가 대동하고 온 도시적 느낌의 정장녀, 필요 이상의 칭찬이 주인공 판돈 내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게다가 친척 아주머니가 풀어내는 판돈 어머니의 굴곡 많았던 인생 이야기와 그 인생의 상흔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깡마른 안짱다리 언급은 이 젊은 부부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게 만든다. 한편 정장녀의 과도하게 오버하는 행동은 웃음을 자아내면서 이 여인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다. 정장녀는 스파크 반신욕조기외판원이었다.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외판원들의 뻥, 삼성 이건희 회장도 쓰고 있다는 그래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스파크 반신욕조기’. 그러나 이 반신욕조기의 가격은 무려 4백만원….어이쿠!!

 

연신 감성을 자극하는 친척 아주머니와 정장녀의 열변에 흔들리는 나, 판돈과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구매를 미루는 아내와 불효의 이분법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친척 아주머니와 정장녀 사이의 갈등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심리전 중에 가장 난처한 인물은 바로 어머니다. 군대 시절 휴가 나와서 죽고 싶다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훔쳐본 나에게 이 짧은 순간은 합리적 판단과 감성적 결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효의 시간이다. 더디더디 흘러가는 불효의 시간은 짠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스파크 반신욕조기를 어머니에게 선물해 드리는 것만이 효도의 전부가 아닐진대 현실적인 고민 자체만으로도 불효가 되는 게 이 시대 자식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특별한 날만 돌아가는 기름 보일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작년 겨울의 초입, 스산한 초겨울 바람만큼이나 어색하게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이번 설은 아버지 없이 보낸 첫 겨울이자 첫 번째 명절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이번 설만큼 추운 명절은 없었지 싶다. 그래도 고향이 주는 포근함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인지 고향집에 들어서는 순간 겨울이 주는 매서운 선물은 과거의 추억 속으로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았다.

 

심정적 푸근함은 고향집을 지켜온 기름 보일러의 실체적 이유이기도 했다. 아직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고향집은 기름 보일러로 겨울을 나고 있다. 이놈의 기름값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위로 위로만 내달리고 있다. 사실 고향집 기름 보일러는 아주 특별한 날에만 가동된다. 설이나 추석 등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오는 날에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아버지가 계실 때에도 어머니 혼자만 계신 이후에도 전기장판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전기장판이 제대로 된 온기를 주기는 하나, 원하는 온도에 따라 전기장판 바닥만 따뜻할 뿐 방안 공기는 바깥이나 다를 바 없는 게 전기장판이 아닌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문득 겨울마다 느꼈던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는지 여느 겨울보다 편안한 느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비로소 나는 불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술로 보내신 탓에 어머니에게는 웬수 같은 남편이요, 자식들에게는 무능력한 아버지였던 당신의 존재. 그래서인지 부자지간의 따뜻한 대화마저도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아른거릴 뿐이다. 그래도 겨울이면 마음 한 켠에는 오늘도 술 한잔 걸쭉하게 걸치신 아버지가 전기장판 너머 냉랭한 냉방 쪽에 주무시지는 않는지 걱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계셨던 불효자의 겨울날은 더디더디 흘러만갔다. 이제야 비로소 이 소소한 걱정을 덜었으니 불효한 자식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헛갈리기만 한다.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고향집을 떠나 기차에 몸을 실었던 세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불효의 시간은 더디더디>라는 짧은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콩나물 시루 같은 기차 안에서 차가운 바깥 풍경 대신 등줄기를 간지럽히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면서 말이다. 쏜살처럼 지나가버린 불효의 시간 대신 더디더디라도 좋으니 불효의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으면’… 후회를 하면서…

<이 포스팅과 관련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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