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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당나귀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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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함께 지내온 늙은 당나귀 한마리를 때려죽였다네 이유인즉슨, 그 망할 녀석이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지 내 몸은 아직 청년처럼 힘이 넘쳐 십리를 더 갈라치면, 녀석은 나를 노인네 취급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가 새로운 돈벌이를 생각해내면,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며 콧방귀를 뀌지 않았겠나

 

나는 말일세 죽은 녀석의 몸을 보기 좋게 토막을 내어 부대자루에 옮겨담았다네 미운 정이 깊어 가슴이 짠하기도 했지만 속은 더할 나위 없이 후련했다네 그날 밤 나는 술을 진탕 마신 뒤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꿈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가서 먹고 마시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이튿날 잠에서 깨어 죽은 당나귀의 토막이 들어 있는 부대자루를 보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군, 죄책감 같은 건 없었고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밭일을 하고 창고를 정리하고 젊은 시절 곁눈질로 배웠던 붓글씨도 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왠지 모르게 따듯한 피 냄새가 그리워 부대자루를 이부자리 곁에 두고 잠을 청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피 냄새는 나지 않고 어디선가 잠을 청하기 좋은 방울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거나하게 취해 친구들과 소풍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 마을이 가까웠을 즈음, 언덕 위에 웬 당나귀 한마리가 주인도 없이 홀로 서 있질 않겠나 그때 곁에 있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네

"이보게 친구, 자네의 당나귀가 마중을 나왔군그래"

 

친구의 말을 듣고 자세히 올려다보니 내가 기르던 당나귀가 틀림없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죽은 녀석이 그곳에 멀쩡히 서 있으니 말일세

 

곁에 있던 또다른 친구가 거들었다네

"그래도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일세, 안아주고 싶거든 어서 가서 안아주게나"

 

나는 꿈속에서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지만, 언덕 위로 성큼 달려가 당나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네 오랜 세월,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함께였던 그 녀석에게 처음으로 심한 죄책감을 느꼈던 걸세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꿈에서 깨어났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잠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네 그런데 잠들기 전에 들려왔던 방울소리가 여전히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죽은 당나귀가 글쎄 머리맡에 앉아 서러운 듯 눈물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운 마음에 녀석을 불러보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네 녀석의 등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두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승에서의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야 했네 흰 수염의 장의사가 방으로 들어와 내 목에 감긴 밧줄을 풀었네 방 한편에는 검은 부대자루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엔 당나귀 대신 늙은 아내의 토막난 시체가 담겨 있었다네 마당에선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전히 나지막한 방울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참으로 다정해서 깊은 잠을 청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리였다네

 

- 황병승 시인의 '당나귀와 아내', 출처.「창작과 비평」2012년 가을호-

 

요즘 중동에서는 유튜브에 올라온 14분짜리 동영상 때문에 반미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네요. 반미시위를 촉발시키고 있는 동영상은 바로 '무슬림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라는 영화인데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사기꾼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거나 소녀들얼 아내로 둔 장면을 담고 있다네요.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욕으로 쓰이는 당나귀를 이슬람교도에 비유하는 등 특정종교를 희화화하고 비하하고 있다는군요.

 

문제는 구글이 이 동영상을 삭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유튜브 가이드 라인에는 '종교에 근거해 대중을 선동하거나 공격을 하게 하는 연설을 포함한 적대적 연설은 금지한다'라고 규정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글측은 이 동영상이 가이드 라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군요.

 

특정종교를 비하하는 영화도 문제지만 유튜브를 소유하고 있는 구글의 대응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해 주고 서로의 생각을 기꺼이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아쉬운 요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犬]가 들어가는 비속어가 많은데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당나귀가 우리의 개와 비슷한 경우인가 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세라자데가 장장 천 하룻 동안의 신비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세라자데가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동물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 동물이 당나귀였던 것 같네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당나귀와 인간과 너무도 친숙한 동물이었나 봅니다.

 

「창작과 비평」2012년 가을호를 받아보고 여태 읽어도 읽어도 머릿 속이 하얗게 되는 시 한 편이 있어서 같이 읽어보려고요. 판타지 같기도 하고 어쨌든 헛갈리긴 하지만 읽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짠해지는 시입니다.  

 

찬찬히 읽으며 감상해 보세요...황병승 시인은 등단할 때부터 한국 시단의 '문제적 작가'로 불렸다네요. 다시 스크롤을 올려 읽어보시죠. <당나귀와 아내>에서 죽은 사람은 '나'일까요, '아내'일까요? 저는 읽을 때마다 서로 다른 답이 나오더군요. 부부의 의미와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주말 보내십시오.

 

*황병승: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리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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