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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시인의 마을

호수가 된 낙동강, 물은 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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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 출처:창작과 비평 2012년 가을호 -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의 여운이 길게 남아서일까 칠백 리 물길 낙동강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주인공 성운의 아픔과 눈물과 사랑이 온전히 녹아 흐르는 듯 보인다. 이념의 굴레 속에서 잊혀져간 어느 지식의 고뇌와 열정을 낙동강은 그렇게 고스란히 머금고 칠백 리를 쉼없이 흘러왔다. 치열했던 전쟁의 참화마저도 낙동강 물길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문명이 강 주변에서 발생한 것도 '흐른다'는 진리 때문이다. 흐르지 못하면 썩는다. 강이 없었으면 인간은 아직도 투박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숲을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억만 년을 흘러 인간들의 젖줄이 되었던 낙동강도 이제는 잠시 쉬어가려는 걸까. 아니면 은혜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 때문일까. 엊그제까지는 '녹차라떼'라는 비웃음꺼리로 전락한 낙동강이 이제는 강의 속성을 잃어버리고 호수가 되었다는 기사에 긴 한숨이 공기를 가를 뿐이다. 4대강 사업으로 생긴 보 때문이란다. 이놈의 보가 물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보와 보 사이에 물이 체류하는 기간이 6일에서 최대 24일에 이른단다. 흐름을 가로막힌 물길을 어찌 강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낙동강'이 '낙동호'가 되어버렸다니 누구를 탓해야 할지.....자연에 순응하지 못했을 때 자연의 복수는 재앙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그야말로 미물의 발버둥마냥 안쓰럽기까지 하다.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가 유쾌하면서도 알 수 없는 통(痛)이 느껴지는 것도 어느덧 담을 쌓는데 익숙해진 우리네 욕망이 지나치게 천박스러운 탓이렸다. 남과 북을 철담으로 가르더니 이제는 물줄기마저 콘크리트 담벼락으로 견고하게 막아버렸으니 말이다. 담장을 허무는 것은 인간이 다시 우주의 질서에 편입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허물어야 흐른다. 흘러야 사는 게 인간이다. 담장을 허물어 맛보는 해방감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봉건영주가 된 저자가 어린애마냥 천진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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