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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뱀은 어떻게 생명의 상징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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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뱀소동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가 보다. 서울 신월동 주택가에는 지난 6월부터 한 달 넘게 뱀이 출현하고 있어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구청과 경찰에 따르면 신월동 주택가 일대의 뱀 출현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풀어졌거나 실수로 놓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주민들은 뱀이 근처 건강원에서 탈출했거나 땅꾼이 보관하고 있다 놓쳤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뱀소동으로 주민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뱀 때문에 노이로제 수준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뱀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나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도 자주 접하다보면 친숙해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뱀만은 예외이지 싶다. 뱀은 실제 위험성보다는 막연한 공포를 일으키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뱀은 인간의 뇌리 속에 왜 공포의 동물로 자리잡고 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은 때로 신성한 영역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외심이기도 하다. 뱀이 공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뱀이 신성시되는 현상 또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왼쪽은 세계보건기구 휘장)

 

그 대표적인 예로 뱀의 한 종류인 구렁이를 집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일부러 잡지 않았던 토속신앙이 있다. 또 뱀이 개구리를 물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는 신라 시대 토우 항아리를 두고 전문가들은 성적 결합을 통한 인간생명의 유지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많은 의료관련 단체의 휘장에도 뱀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보면 뱀과 생명의 관계는 비단 해석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오래된 믿음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인 게놈(Genom)도 뱀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꼬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뱀에 대한 공포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오른쪽은 세계 의사회 휘장)

 

그렇다면 뱀은 어떻게 생명의 상징이 되었을까. 인류가 걸어론 삶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신화를 통해 그 비밀을 파헤쳐보고자 한다. 우선 뱀과 생명을 주제로 한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아래 오른쪽은 대한의사협회 휘장)

 

유전자정보의 집합인 게놈은 뱀 두마리가 서로 몸을 꼬아서 올라간 쌍두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의 인장에는 교접하는 쌍두사의 형상인 뱀신 닝기쉬즈다가 있습니다.

 

헤르메스가 사용하는 카두케우스 지팡이와 모세의 권능을 수행한 청동 뱀의 지팡이도 있군요.

아즈텍의 깃탈 달린 뱀신 케찰코아틀은 위대한 쌍둥이로도 불렸고 죽음을 통해 부활하는 힘의 기원이었습니다.

생명나무가 있던 에덴동산에는 고대의 뱀이 있어서 이브에게 선악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아마존의 샤먼들은 지금도 엑스터시에 젖은 채 환상 속의 뱀으로부터 식물과 약초의 지혜를 전수받는다고 합니다.

 

탄드라 행자인 요기들은 호흡으로 미저골 아래 잠자는 뱀의 기운 쿤달리니를 일깨워 머리를 들게 합니다.

불의 요가와 꿈의 요가와 빛의 요가가 '생명의 나무'인 척추를 거꾸로 올라가는 기술입니다.

태양과 달의 기운으로 일곱개의 차크라를 각성시킨 쿤달라니는 요기의 정수리에서 '천개의 꽃잎으로 피어난 연꽃'을 각성시켜 요기의 영혼을 불사에 이르게 합니다.

생명의 비밀한 힘들은 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을까요.

고대인들은 어떻게 뱀의 이미지와 형상으로부터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환각식물이나 엑스터시의 힘으로 유전자에 숨어있는 생명의 프로그램을 엿본 해커였을까요.

 

-김백겸의 시 <생명나무와 뱀>, 출처:《창작과 비평2012년 여름호-

 

시 한 편에 그리스와 아즈텍, 인도, 히브리 등 세계신화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다. 이밖에도 중국과 이집트, 게르만 신화에도 중요한 신들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뱀은 곧 생명의 상징으로 표현되곤 한다. 신화의 전파를 입증이라도 해주듯 전세계 신화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뱀의 상징성은 생명의 비밀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경외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뱀일까.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뱀이 생명의 상징이 된 내력을 살펴보자.

 

의과 대학생들이 의사가 될 때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것이 있다. 히포크라테스(왼쪽)는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고 '의술의 성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을 통해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만든 의료인의 윤리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히포크라테스의 스승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졌네'의 그 아스클레피오스. 한편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버지는 아폴론이다. 아폴론을 대표하는 다양한 수식어 중 '의술의 신'은 이런 내력 때문이지 싶다. 현재 의료관련 기관의 휘장에 그려져 있는 뱀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지키던 흙뱀을 상징한다. 왜 흙뱀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 지켰을까. 그 내력은 아버지 아폴론 시대를 거쳐 태초의 생명이 탄생하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너 자신을 알라'는 대개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신탁소인 델포이 신전의 입구 기둥에 씌여진 일종의 신탁이라고 한다. 이 델포이의 주인이 바로 아폴론이다. 그러나 아폴론이 처음부터 델포이의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왕뱀 피톤이 델포이의 주인이었다. 결국 아폴론이 델포이 신전과 함께 왕뱀 피톤의 예언능력을 빼앗은 것이다.

 

왕뱀 퓌톤의 탄생은 생명의 신비에 관한 인류의 호기심을 신화적으로 표현해낸 것으로 보인다. 대홍수가 끝나고 신들만이 존재했던 세상에 비로소 생명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물론 과학의 발달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태초에 생명을 탄생시킨 비밀은 불과 물이었다. 즉 대홍수 이후 땅의 습한 기운은 햇빛을 머금으면서 다양한 생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왕뱀 퓌톤이었다. 퓌톤이 습한 대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어머니라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퓌톤의 아버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왕뱀 퓌톤은 태어날 당시부터 불운한 운명을 타고났다. 어머니 가이아로부터 피토(델포이의 옛이름)의 주인으로 예언능력을 받았지만 아폴론에게 죽을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 퓌톤은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태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보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신들의 세계에서 주신의 예언은 결코 바뀔 수 없다. 운명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 게 신화의 세계에서는 법칙과도 같다. 결국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라는 쌍둥이가 태어났다.(오른쪽은 그림은 아폴론이 퓌톤을 죽이는 장면)

 

문제는 아폴론의 아버지 제우스가 아들에게 예언능력을 주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폴론이 태어날 당시 예언의 땅 피토는 왕뱀 퓌톤의 지배하에 있었다. 결국 아폴론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신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왕뱀 퓌톤을 처절하게 죽이고 피토를 델포이라는 이름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폴론의 예언능력은 단지 아버지 제우스의 선물이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왕뱀 퓌톤이 죽었을 당시 그에게는 퓌티아라는 아내가 있었다. 여기서 제우스가 아들에게 주었던 예언능력은 철저하게 계산된 음모였음을 알 수 있다. 제우스는 왕뱀 퓌톤의 아내 퓌티아를 아폴론 신전의 사제로 임명한 것이다. 즉 아폴론의 예언능력은 바로 퓌티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아폴론에 의해 죽은 왕뱀은 어떻게 되었을까. 퓌톤은 아폴론에 의해 신화 속에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옴팔로스에 묻혔다고 한다. 옴팔로스는 헤라클레스가 여장을 즐겼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델포이는 '자궁'을 의미한다고 한다. 왕뱀은 아폴론 시대 이전 델포이(피토)의 주인이었고 죽은 후에는 아내 퓌티아가 델포이의 사제로 있었으니 신화 속에서 뱀과 생명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나 보다. 게다가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가 세운 의과대학(신전)에 흙뱀을 길렀다고 하니 아스클레피오스의 뛰어난 의술도 뱀의 능력을 이용했음은 자명해진다. 이 때문인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신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신화 속 법칙이었으니 훗날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은 것도 다 이 때문이었으리라. 생명을 다루는 의료 관련 기관들의 휘장에 공통적으로 그려진 뱀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지키는 흙뱀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뱀은 델포이 말고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헤라클레스가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뱀과 싸워 이긴 이야기다. 헤라클레스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지만 실제로 헤라클레스는 계모인 헤라의 젖을 너무 세게 물어 그 젖이 흘러 은하수(Milky Way)가 되었다는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편 그리스 신화 속에서 인간세상의 최고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가 어느날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을 지팡이로 때려 한때 여자로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훗날 다시 그 뱀들을 지팡이로 때려 남성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어쨌든 뱀 때문에 테이레시아스는 최초의 양성인간이기도 했던 것이다.(왼쪽은 육체적 눈을 잃은 대신 심안을 가진 테이레시아스)

 

뱀을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론 신성시하는 것도 생명에 대해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에 있는 의료관련단체들의 휘장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세계보건기구나 세계의사회 휘장과 달리 대한의사협회 휘장은 지팡이 양쪽에 날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말이다. 한동안 의사협회 내부에서 논란거리였다고도 하는데 이 포스팅을 작성하기 위해 의사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는데 여전히 예전 휘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차이일까.

 

세계보건기구나 세계의사회 휘장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뱀이 휘감고 올라가는 모양이지만 대한의사협회 휘장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대신 헤르메스의 날개를 뱀이 타고 올라가는 형상이다. 어떤 이유로 의사협회 휘장이 헤르메스(오른쪽)의 날개를 형상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스클레피오스와 헤르메스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었다면 헤르메스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즉 제우스의 전령인 헤르메스는 타르타르(지옥)를 수시로 왕래할 수 있었다. 생명연장의 꿈, 영원히 살고픈 인간의 꿈을 형상화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헤르메스의 이런 능력은 신화 속에서도 극히 예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세계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깨질 수 없는 또는 깨져서도 안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신화 속에서 헤르메스는 도둑의 신이나 상업의 신으로 더 통용되고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뱀이 두렵고 무서운가? 뱀보다 더 무섭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고 인간의 생명이다. 생명이라는 존엄한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할 인간의 최소한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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