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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공유한 극단적 패륜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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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의 <암사지도>/1956년

……너 그럴 것 없다. 그러지 말구 최형(윤주)과 자란 말이야! 일주일에 한 번만 더두 말구 그러란 말야! 그쯤이 그중 건강에 좋지. 나야 이젠 싫증이 났지만 너와 보조를 안 맞출 수도 없으니 난 토요일로 정하지. 너 일요일로 정하려무나……그런 데 마구 다니다간 큰 변난다.”

 

상덕은 사창굴을 전전하는 친구 형남에게 그의 동거녀 윤주와의 성적 관계를 제안한다. 이른바 '윤주 공유설'이다. 요즘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라도 이 정도까지의 표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윤주 공유설'은 서기원의 소설 <암사지도>의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임에 틀림없다. 행간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암사지도>는 그저그런 삼류소설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가히 충격적인 소설적 장치를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윤주 공유설'이 상징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이 한국전쟁 직후라는 것과 제목으로 쓰인 '암사지도(暗射地圖)'가 
각종 정보를 기입하기 위한 작업용 기본도로 지도의 윤곽이나 경계, 하천, 도시, 철길 등을 표시하나 글자는 쓰지 않는 '백지도'라는 개념을 우선 알아야 한다. 

 

                      ▲상덕은 형남에게 사창굴 대신 '윤주 공유설'을 제의한다. 사진>디시뉴스

전쟁이 빚어낸 비극

법대생 상덕은 전우인 미대생 형남에게 전역하고 변변한 잠자리가 없으면 자기 집으로 올 것을 제안한다. 이 때 상덕이 형남에게 자신의 집을 그려준 백지도 즉 암사지도는 '윤주 공유설'이 등장하게 된 상황적 배경이 된다. 

상덕은 형남에게 장차 사회에 나와 잠자리가 변변치 않으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주소에다 열댓 칸짜리 한식 기와집의 구조마저 그려가며 대문간과 맞붙은 뜰아랫방을 빨란 오일 연필로 꼭꼭 찔렀던 것이다.
"고오마운 말씀이지. 원랜 그 사나이 첩의 집이거든, 원 집은 폭격에 폭삭 녹아버렸지. 모조리 전멸야. 웬일인지 그 집 명의가 그 사나이 이름으로 있다가, 그 첩두 역시 돌아가셨더라 그 말씀이야. 기맥힌 유산이지." -<암사지도> 중에서-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가족의 단절이다. 가족의 단절은 윤리의 파괴로 이어진다. 게다가 형남이 전역하고 첫 발을 내디딘 동대문의 소회는 지난 삼 년간의 군대생활이 꿈처럼 느껴지고 동대문 안으로 뻗은 번화한 거리가 생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흔은 일상의 불확실성 바로 그것이다. 비로소 시작되는 상덕과 그의 애인 윤주 그리고 형남의 불안한 동거.

전쟁의 상처는 결코 정상적인 일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덕과 윤주, 형남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상적인 일상을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전쟁의 후유증은 기원이나 드나드는 백수의 삶과 극장 간판쟁이로 전전해야만 하는 미대생의 추락이며 정신적 타락이다. '윤주 공유설'은 정상적인 일상이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재된 욕망과 전쟁이 가져다준 참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마는 비정상적인 현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인간성과 윤리의 파괴는 전후세계가 허무주의 그 이상의 참혹한 현실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사지도 또한 전후세계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잉태된 또 하나의 비극과 희망

'윤주 공유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비극은 윤주의 임신이다.

"내 것이란 생각뿐이에요. 거야 틀림없이 두 분 중에 한 분이 애 아버지겠죠. 허지만 그건 두 분 다 애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확실한 건 내 거란 것뿐이거든요. 당신들엔 아무 권리가 없어요." -<암사지도> 중에서-

여기서 윤주는 가출을 선택한다. 포탄에 지붕이 뚫어진 비극적 현실과 비극적 현실이 낳은 외상적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다. 가출하는 윤주가 상덕과 형남을 향해 '굿바이! 신사 여러분들이여'하고 익살스런 표현을 하는 데서 비극의 강도는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한편 윤주의 가출은 '암사지도'라는 제목과 함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기대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글자가 전혀 없는 백지도는 그만큼 글자를 채워넣을 수 있는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즉 윤주의 뱃 속 아이는 백지도에 새로운 지형을 그려나갈 미래의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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