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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1953년 부산과 2011년 대한민국의 끝의 끝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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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의 <비오는 날>/1953년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출찰구를 빠져나오자 마자 그렇게 쓱쓱 찾아갈 곳이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한 순간에 동지에서 벗어나 그렇게 용감하게 자유를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 부산의 끝의 끝, 막다른 끝이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 끝의 끝, 막다른 끝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옮기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정녕 이 끝의 끝, 막다른 끝까지 온 사람은 중구 자신 뿐이란 말인가.

김동리는 그의 소설 <밀다원시대>(1955년)에서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피난처 부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끝의 끝. 김동리는 전쟁의 상흔이 남긴 극한의 절망적 상황을 '끝의 끝'이라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단어로 끄집어냈다. 한편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끝의 끝'이라는 설정은 대표적인 전후 작가로 알려진 손창섭의 <비 오는 날>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저자는 <비 오는 날>을 통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가져다 준 허무주의와 자조와 냉소, 인간의 무력한 삶을 관찰자의 눈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소설 속 주인공이기도 한 관찰자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등장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에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이 남긴 상흔들을 보다 객관적이고 처절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또한 김동리가 말한 '끝의 끝' 상황은 몇가지 소설적 장치들을 통해 전쟁이 남긴 참상과 허무주의의 깊이를 강도높게 심화시켜준다.

 

                   ▲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모습.     사진>부비뉴스

먼저 제목이기도 한 '비 오는 날'은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비가 아닌 지루한 장마를 대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원구가 그의 친구 동욱, 동옥 남매를 만난 날부터 그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비 오는 날'은 계속된다. 음산하고 우울한 기분을 자아내는 장마는 전쟁의 상흔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망적 상황에 대한 불안과 자조의 표현이다. 원구에게 기억되는 이들 남매는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인 것이다.

무덤 속 같은 이 방 안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구해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빗물 소리마저 바께쓰에 차츰 물이 늘어갈수록 우울한 음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중에서-

특히 저자는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아이들 만화책에 나오는 도깨비집에 비유함으로써 비루한 삶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폐가나 다름없는 동욱 남매의 집이 왜정 때부터 사용되어온 건물이라는 표현에서 어떤 환희의 순간에도 비참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소시민들의 절망감이 장마처럼 지루하게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해 준다. 게다가 동욱의 여동생 동옥이 원구와의 첫 만남에서 보여주었던 냉소적인 태도는 인간 자체마저 신뢰할 수 없게 만든 전쟁의 폐악이다. 그럼 이들을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깊은 허무주의의 단면을 본다. 목사가 꿈인 동욱이 초상화를 팔아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점이나 구원(救援)을 뒤집어 원구(元具)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저자의 의도에서 이는 더욱 확연해진다. 

마지막으로 부산은 김동리의 소설에서 인용했듯이 '끝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최후의 피난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삶의 현실인 동시에 심리적 절망감의 극한적 공간이다. <비 오는 날>도 다른 전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삶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과 허무주의만 있을 뿐 저자 또는 주인공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깊게 패인 전쟁의 상처를 씻을 수 있는 길은 동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또 그런 누군가가 있다는 동질감과 연대감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모 뉴스전문 채널에 출연해 최근의 세계 경제위기와 우리 정부의 대처방법에 대한 대담을 본 적이 있다. 박승 전 총재는 다시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불어닥쳐도 한국만은 예외가 되든지 어느 나라보다 빨리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생각보다 한국의 기업과 금융권이 탄탄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의 경쟁력이 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이나 금융의 성장과 같은 속도로 서민들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은 성장보다는 복지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성장이 복지를 확대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업들은 감세 등 각종 특혜를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 있지만 철저하게 기업과 부자의 논리에 촛점이 맞춰진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서민들의 생활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하나 하나 예를 들기에도 모자랄 정도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는 현실일 것이다. 전후 소설에서 나타나는 절망과 허무주의가 물리적 폭력의 결과라면 지금의 그것은 제도와 사람의 문제다. 게다가 언론의 침묵과 미디어의 휘황찬란한 볼거리는 왜곡된 현실을 부풀리는 꼴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사람은 서민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현정부를 당당히 성공한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인과 보여지는 그림만 다를 뿐 소시민들에게 1953년 부산과 2011년 대한민국은 '끝의 끝' 닮은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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