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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불은 누가 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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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1925년

이러할 때마다 벙어리의 가슴에는 비분한 마음이 꽉 들어찼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아들을 원망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병신인 것을 원망하였으며 주인의 아들을 저주한다는 것보다 이 세상을 저주하였다.”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오생원집 머슴 삼룡이는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아도 상대를 원망하는 법이 없다. 사회적 약자로서 그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록 강요된 선택일지라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고개는 몸뚱이에 대강 붙어있고 땅딸보에 불밤송이 머리를 하고 옴두꺼비마냥 더디게 걷는 삼룡이는 벙어리다. 세상 손가락질은 다 받고 살지언정 그도 사람이다. 그는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안다. 흔하디 흔한 사랑, 그라고 못해봤을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지 마라. 뜨거운 불길 속에서 불 같은 사랑을 한 아니 불보다 더 뜨겁게 살다간 삼룡이 앞에서는 침묵할지어다.

 

나도향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읽는 내내 사랑은 국경도 없다는 말이 무색하기 그지 없어진다. 짧은 순간 그것도 죽음이라는 찰나에 확인받은 사랑이지만 그의 입가에는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엷게 퍼져 있었다. 벙어리 삼룡이의 사랑이 심장을 뛰게 하는 이유는 주인 새아씨에 대한 알 수 없는 사랑이 자유와 권리에 대한 자각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는 통속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국엔 약자의 희생이라는 결말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온몸으로 전해지는 카타르시스 또한 만만치 않다.

 

삼라만상을 씻어내는 은빛보다도 더 흰 달이나 별의 광채보다도 그의 마음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듯하였다. 마치 달이나 별이 땅에 떨어져 주인 새아씨가 된 것 같고, 주인 새아씨가 하늘에 올라가면 달이 되고 별이 될 것 같았다.”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벙어리 삼룡이』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 불이다.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만 있는 어느날 저녁, 삼룡이는 주인 새아씨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결국엔 그렇게도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주인 새아씨의 품에서 영원한 꿈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 소설에서 불이 상징하는 주제들이 강렬한만큼 불을 낸 주체가 누구였냐에 따라 불이 가지는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다. 분명 오생원 집 화재는 방화다. 또 불길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주인 새아씨의 행동에서 방화의 주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는 소설 어디에도 주인 새아씨의 방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불을 질렀을까?

 

난데없는 화염이 벙어리 있던 오생원 집을 에워쌌다. 그 불은 미리 놓으려고 준비하여 놓았는지 집 가장자리로 쭉 돌아가며 흩어놓은 불에 모조리 돌아붙어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은 집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일 듯이 불이 타오른다.”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주인 새아씨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불길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자살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몰락한 양반의 딸이다. 오생원 집에 시집온 것도 돈에 팔려서다. 그녀는 자유연애의 바람 속에서도 전통적인 한국의 대표 여인상이다. 울면은 요사스럽다고 맞고 말이 없으면 빙충맞다고 맞는다.

 

술에 취해 무지한 놈에게 맞아 길에 자빠진 남편을 업고 온 삼룡이가 고마워서 부시쌈지 하나를 선물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새아씨가 삼룡이에게 연분의 정을 느꼈다고 해석한 모양인데 지나친 해석이지 싶다. 그저 고마웠을 뿐 여전히 삼룡이는 그 집의 머슴이다. 어쩌면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하고 죽은 삼룡의 주검 앞에서도 연민의 정은 느꼈을지언정 연분은 생각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이 사건으로 그녀는 더욱 표독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밖에는 없지 않았을까? 그녀는 불을 통해 여성이라는 편견의 굴레와 가부장적 사회가 지켜온 모순들을 태워버리고 싶었을 게다.  

 

벙어리 삼룡이

 

부시쌈지 사건과 자살하려는 새아씨를 구하려 안방에 들어갔다 오해를 받고 오생원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가 새아씨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언급은 미리 했다. 소설 속에서도 그가 방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은연 중에 내보이고 있다.

 

그는 비로소 믿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자기의 원수가 된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기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 나은 것을 알았다.”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그가 방화범이라면 문제는 왜 하필 그가 그토록 사모하는 새아씨가 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을 향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사랑과는 별개로 참혹한 현실을 자각한 파괴 본능은 아니었을지고리타분하지만 단순히 불 같은 사랑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불은 두 말할 필요 없겠다.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어찌됐건 삼룡이와 새아씨 사이에 놓인 두터운 벽은 불로 인해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막난이 남편의 세상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선을 표현했을 수도 있다. 아내가 머슴하고 정분에 빠졌다는 오해에서 오는 자격지심의 발로일 수도비록 불길 속에서 삼룡이에게 삶을 구걸하기는 했지만,

 

25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나도향의 불꽃 같은 삶이 여기 『벙어리 삼룡이』에 투영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다. 불은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도 하고 새로 창조하기도 한다. 불은 사랑이다. 불 같은 사랑을 꿈꾸는가? 자나깨나 불조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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