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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나는 이래서 XX단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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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최서해의 『탈출기』/「조선문단」6호(1925.3)/창비사 펴냄

조선의 막심 고리키최서해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냉전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슬픔이자 아픔이다. 나의 저급한 문학적 소양을 일반화시키는 오류일수도 있겠지만 우리 과거가 그랬고 현실이 또 그렇다. 색안경을 끼고 볼 기회조차도 억압받았던 시대, 소위 좌파문학이라 일컫는 우리 소설들은 교과서에서도 외면받았고 가령 교육을 받았다손치더라도 몇 줄에 불과한 설명뿐이었다. 최서해의 『탈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출판사가 제공한 작가 최서해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본명이 학송인 최서해는 1901년 함경북도 성진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스물넷 되던 1924년 단편소설 『고국』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데뷔했고, 『탈출기』, 『기아와 살육』 등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문학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탈출기』는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부부와 노모, 이 세 식구의 눈물겨운 참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신경향파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다른 작품으로는 『홍염』, 『박돌이의 죽음』, 『해돋이』 등의 단편과 장편 『호외시대』가 있다. –창비사 제공-

 

최서해의 소설을 빈궁문학이라고 한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그의 밑바닥 체험이 소설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는 당시 카프경향문학과 그 맥을 같이 하지만 당시 카프경향문학 작가들이 대부분 넉넉하지는 않아도 결코 빈궁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서해의 문학만이 가지는 진실성과 생동감을 짐작할 수 있다.

 

『탈출기』는 서간문의 형식을 빌어 김군에게 자신이 XX단에 가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소설이다. 동시에 간도 지역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존재를 조국에 알리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꿰뚫어 본다면 XX단이 사회주의 내지 아나키스트 항일무장조직이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부모와 처자를 위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라는 김군의 권유에도 나는 왜 탈가를 해야만 했을까?

 

식민지 민중의 이상, 간도. 그러나

 

절박한 생활에 시든 내가 선택한 간도는 꿈에 그리던 이상이었다.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이상촌을 건설하리라. 이렇게 하면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할 수도 있다.” -『탈출기』 중에서-

 

그러나 빼앗긴 식민지 민중의 설움이 조국을 벗어났다고 해서 새로운 희망으로 바뀔 리 만무했다. 빈 땅도 없거니와 돈이 없으면 일 평의 땅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소작인이 되는 수밖에, 그나마 높은 소작료로 농사를 지어도 일 년 양식도 마련하기 힘들었다.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서 망망한 평야와 산천을 바라보며 이상을 불길로 타올랐던 내 청춘의 가슴은 그렇게 무너지고 다시 조국에서와 같은 빈궁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내가 XX단에 가입한 이유

 

결국 온돌장이가 되어야만 했고 이도 여의치 않아 생선 장사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생선과 바꾼 콩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두부로 연명해 가지만 이마저도 큰돈은 되지 못했다. 길에서 주운 귤껍질을 몰래 먹고 있는 아내를 오해한 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두부를 만들어 팔기 위해서는 땔나무가 필요했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아내와 나는 나무를 도둑질해야만 했다. 이웃은 우리를 조소하고 경찰은 우리를 의심했다. 나무 절도 사건이라도 날라 치면 경찰은 불문곡직하고 우리 집부터 수색하고 질문하고 나를 때린다. 호소할 곳 없는 북국의 겨울은 그렇게 깊어가지만 나의 생활은 점점 추락만 할뿐 비상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세상에 충실해도 세상은 나를 충실하게 봐주지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여태까지 속아 살았다. 포학하고 허위스럽고 요사한 무리를 용납하고 옹호하는 세상인 것을 참으로 몰랐다. 우리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네들은 그러한 세상의 분위기에 취하였었다. 나도 이때까지 취하였었다.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험악한 제도의 희생자로서 살아왔었다.” -『탈출기』 중에서-

 

비로소 주인공의 자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깨어나려 애쓰는 주인공의 의지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고 결심한다. 이 결심은 내가 김군에게 말한 탈출의 이유이기도 하다.

 

김군!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나부터 살리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최면술에 걸린 송장이었다. 제가 죽은 송장으로 남을 어찌 살리랴? 그러려면 나는 나에게 최면술을 걸려는 무리를,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를 쳐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탈출기』 중에서-

 

나의 자각은 비단 식민지 민중에 대한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계급적 자각이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써 좌파문학이라는 꼬리표 아닌 꼬리표를 달게 되는 것이다.

 

변절을 거듭한 우파 문학인들에게 비해 도덕적 우위에 있었던 좌파 문인들이라고 해서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탈출기라는 제목에서 보듯 삐뚤어진 현실에 대항한 투쟁보다는 도피(?)로 간주될 수 있는 탈출을 선택한 점은 분명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어디에도 현실과 대항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최서해 자신도 말년에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투신하기도 했으니 아픈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번뇌와 고민이 만만치는 않았던 듯 싶다.

 

우리는 지금껏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문학인은 되고 월북이나 납북된 문학인은 안되는슬픈 역사를 살아왔고 그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마도 분단이라는 비극이 계속 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역사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보게 될 좌파문학을 통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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