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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로마

화로의 여신 베스타와 베스타의 여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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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신화에서 베스타Vesta(그리스 신화의 헤스티아)는  불과 화로의 여신이었다. 화로는 고대 로마 가정에서 매우 중요한 물건으로 그곳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오늘날에도 화로는 매우 중요해서 부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베스타 신전에는 신성한 불이 타올랐다. 베스타 처녀들이라는 여사제들이 불꽃을 관리했는데 고대 로마에서 유일한 여사제들이었다. 그들은 베스타 제단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Vestal Vergins). 출처>구글 검색


고대 로마인들은 신전의 꺼진 불이 로마 제국의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사제들의 역할은 도시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매년 3월의 첫 날에 베스타 신전의 불을 새로 밝혔다. 이런 의식은 로마 황제에 의해 이교도 숭배가 금지된 380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고대 로마에는 베스타를 기리기 위해 베스탈리아Vestalia라는 축제가 있었는데 오로지 여성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성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신전을 맨발로 행진하는 것으로 베스타 여신을 기렸다.

베스타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딸이었다. 크로노스는 베스타를 비롯한 자기의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집어 삼키는 엽기적 행각을 보였다. 베스타의 동생이자 나중에 신들의 왕이 될 주피터Jupiter(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의 계략으로 그들은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삼킨 반대 순서로 뱉어냈기 때문에 베스타는 형제들 중 막내가 되었다. 그녀의 사랑스런 외모는 많은 남성 신들의 구애를 받기에 충분했다. 아폴로Apollo(그리스 신화의 아폴론)와 넵튠Neptune(또는 넵투누스Neptunus,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이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베스타는 오빠이자 최고신 주피터에게 영원히 처녀로 살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고 이후 베스타는 가정과 가족의 상징이자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는 로마 모든 가정에서 숭배되었다. 화로를 라틴어로 ‘포커스Focus’라고 했다. 현대 영어에서 ‘포커스’는 행동이나 주의의 중심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되었다. 인간의 삶에서 화로의 여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불을 제단에 바치기도 하고 타오르는 불에 제물을 던지기도 했다.

베스타 신전에는 베스타의 이미지가 없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베스타는 형체가 없는 신으로 불꽃 자체라고 생각했다. 베스타의 이미지는 당나귀라는 사랑스런 동물로 대체되기도 했다. 베스타와 당나귀의 연관성은 그녀의 빵 굽는 행동에서 비롯됐는데 그것은 물론 화로에서 행해졌다. 당나귀는 빵을 굽기 전 밀을 갈기 위해 맷돌을 당긴 동물이었다. 베스타는 또한 꽃과 때로는 주전자를 들고 가정생활을 표현했다. 옷을 벗은 상태로 등장하는 다른 여신들과 달리 베스타는 항상 옷을 입고 있었다.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은 정절을 맹세하고 공부와 종교 의식에 전념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10세 미만일 때 선별적으로 뽑혀 30년 동안 독신을 서약했다. 베스타의 여사제들은 테두리가 자주색으로 된 하얀 가운을 입었으며 로마 사회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았고 많은 특권도 누렸다. 처음 10년은 공부, 다음 10년은 봉사, 마지막 10년은 교사로 보냈으며 30년이 지나면 사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결혼은 처녀들의 감독관이었던 폰투스 막시무스 대제사장이 주관했다. 베스타 여사제 출신과 결혼하는 것은 고대 로마 남성들의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결혼하지 않는 것을 선호했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며 편안한 은퇴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특히 베스타 신전 여사제들을 고르는 의식을 캅치오Captio라고 불렀는데 이는 ‘포획’이라는 뜻이다. ‘포획하다’라는 뜻의 영어 ‘캡쳐Capture’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베스타 여사제들의 특권 중 가장 큰 것은 모든 대중 모임에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를 탈 수 있었다. 콜로세움 경기에서는 행사를 잘 볼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보장받았다. 그들의 판단과 성격은 흠잡을 데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도시와 시민들에 대한 중요한 문서의 수탁자이기도 했다. 로마 사회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베스타 여사제들은 남성 가장의 비재를 받지 않았고 그 자유와 함께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다. 또 그들에게는 투표권도 있었다. 한편 베스타 여사제들을 해친 것에 대한 벌은 죽음이었다.

베스타 여사제들은 국가에 출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에 의한 성관계는 국가 반역죄로 취급되었다. 베스타 여사제들의 뭇남성들과의 성적 접촉에 대한 벌은 생매장이었다. 특이한 것은 베스타 여사제들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 또한 범죄였기 때문에 며칠 간의 물과 음식을 주고 성문 근처 지하실에 가두어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끔찍한 처벌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베스타 여사제들 중 투치아라는 사제는 순결 서약을 어겨 비난을 받았지만 구멍이 송송 뚫린 채에 물을 담아내는 기적을 행해 곤경에서 벗어났고 포스투미아라는 여사제는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옷차림과 성격으로 지하실에 갇혔지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한편 여사제들과 성적 접촉을 한 남성들은 태형에 처해져 죽는 경우도 있었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380년 베스타 숭배를 폐지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이교도 탄압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 가슴 속에는 여전히 베스타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헤스티아 여신과 동일시되는 로마의 불과 화로의 여신 베스타에 관한 기록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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