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냄새/압듈 아지즈 가르몰(Abdel Aziz Gharmoul, 1952~, 알제리)
대통령 비판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제격인 때가 있었다. 대통령도 기꺼이 동의했다. 바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다. 서민들의 노곤한 일상을 해소해주는 안주거리가 대통령 비판이었다. 언론조차도 국가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걸로 처벌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만들어 노 대통령을 향해 ‘노가리’, ‘육시럴 놈’ 등의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 연극 객석에는 박장대소하며 노 대통령 비난을 즐기던 박근혜 대통령도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정치 풍자 특히 대통령 풍자는 처벌의 대상으로 돌변했다. 그렇다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대통령 풍자와 비난과 관련된 고소·고발 건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의 꽃이 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가 대통령에 대해서만은 예외가 되었다. 정부 관료들도 우리나라의 표현의 자유가 도를 넘었다며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있다. 대통령을 풍자하고 비난할 때만. 심지어 박정희 풍자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우리 사회의 저급성과 후진성은 그야말로 볼 장 다 봤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쪽에서 김정은이 그런 것처럼 남쪽에서는 박근혜 이름 석자가 ‘최고 존엄’으로 등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홍대 주변에 뿌려진 박근혜 대통령 풍자 포스터
알제리 작가 압듈 아지즈 가르몰의 <저항의 냄새>를 읽으며 한 치의 비판이나 비난도 허용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떠오른 것은 어쩌면 씁쓸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이름도 발음도 생소한 작가는 물론 알제리라는 국가마저 선뜻 떠오로는 이미지가 없다. 주인공 뫼르소에게 왜 살인을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 <이방인>의 저자 알베르 까뮈의 고향이라는 것 빼고는 경직된 이슬람 국가라는 편견만 존재할 뿐이다.
맞다. 알제리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결부된 대부분의 아랍 대부분의 국가들 이미지는 정체와 경직이다. 알지 못한 사회에 대한 편견은 부정적 이미지가 화석처럼 굳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 그 안에도 아니 어느 사회에도 역동적 움직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소설 <저항의 냄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회의 역동성이 존재하고 있었고, 거울을 대하듯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까지도 비춰주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매 5년마다 대통령 선거를 하지. 5년마다 총선거 국민투표를 개최하지. 다른 나라처럼 국회도 있지. 사람들이 서점에서 잘 사지도 않는 이런 책들에 대해 왜 염려를 하지? 대통령, 군대 총사령관, 국회의원, 고위 관직자들을 혼란시킬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책, 그런 불온한 책이 여기 그의 책 가운데 어디 있다는 거야? 이상한 일이군!” -<저항의 냄새> 중에서-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초인종이 울리고 그는 여느 때처럼 문을 열었다. 바깥복도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키가 크고 말쑥하게 변장한 그에게 남자는 총을 겨누고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직업은 경찰이다. 그는 현 정부의 정치적 우매함과 독재를 조롱한 풍자 만화가다. 남자(경찰)의 방문은 그(풍자 만화가)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두 남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은 3개월에 걸쳐 국제 경찰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보안 기관에 도움을 받아 이 풍자 만화가의 체포에 전력을 다했다. 그의 혐의 목록은 매일 점점 더 늘어갔다. 체포 기관의 책임자는 오존층이 파괴된 것까지 모조리 그 풍자 만화가의 책임이라고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대통령을 그렇게 괴롭혔던 갈겨 쓴 글의 힘이 어떤지 당신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저항의 냄새> 중에서-
오존층 파괴의 책임까지 풍자 만화가에게 뒤집어 씌우고 싶어 한다는 표현에 국가 권력의 잔혹성과 치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다면 그를 암살함으로써 권력은 영원할 수 있을까? 국가 권력은 저항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수색대원을 안내해 줄 잘 훈련된 독일 마약견에게 그 풍자 만화가의 옷을 주는 등, 그를 찾는데 주력해 왔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남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풍자 만화가)를 죽여야 할지, 그를 영창에 보내야 할지, 아니면 보상금을 받고 일찍 경찰직을 그만 두어 보통 인간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지를 말이다. 남자의 확신은 흔들린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죽음을 충분히 보아왔고 이런 사람, 즉 풍자 만화가와 같은 사람을많이 죽여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저항의 냄새> 중에서-
죽음을 앞둔 그(풍자 만화가)의 마지막 풍자가 압권이다. 그(풍자 만화가)는 알몸으로 안경을 쓴 채 펜을 흔들며 남자(경찰) 앞에 섰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 있던 풍자화를 남자(경찰)에게 건네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떠나기 전 이 그림으로 나를 덮어주고 싶어질 거요. 날씨가 추워질 테니까요.”
고민하는 남자(경찰)에게 아니 저항의 냄새만 쫓는 국가 권력을 보기 좋게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과연 그(풍자 만화가)의 운명은? 또 남자(경찰)은 국가 권력의 명령을 수행했을까? 상상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분노는 진보하는 역사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분노의 이면에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권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은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분노의 집합체다. 표현의 자유는 저항에 이르기 전에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을 진일보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두 얼굴에 직면해 있다. 분노 즉 표현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자연스런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억압함으로써 저항에 맞닥뜨려 권력의 파멸을 자초할 것인가. 과연 우리 사회는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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