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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늦은 국화(만국, 晩菊)/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1951)/1948

 

한 여자가 있다. 옛사랑으로부터 일 년 만에 전화를 받은 여자는 서둘러 목욕을 한다. 탕 속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되풀이한다. 냉장고 얼음을 잘게 깨서 가제에 싼 뒤 거울 앞에서 서서 골고루 마사지를 한다. 피부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된다. 정종을 다섯 잔 정도 단숨에 마신다. 희미하게 취기가 오르면 눈 밑이 붉게 물들고 커다란 눈이 촉촉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양치질을 해서 술 냄새를 없앤다. 푸른빛이 도는 화장을 하고 글리세린으로 갠 크림을 바른다. 립스틱만은 고급스러운 것으로 골라 짙게 바른다. 로션을 손등에 바르고 향수는 달콤한 향이 나는 것으로 어깨와 두 팔뚝에 바른다.

 

여전히 한 남자의 여자이고픈 晩菊

 

여자의 이름은 아이자와 긴이다. 놀랍게도 긴의 나이는 쉰여섯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 보이지만 긴은 아직도 남자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세상의 보통 노파 같은 지저분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긴은 옛사랑과 헤어졌을 때보다 더 젊게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여자이기를 포기할 수 없기에 더 애처로워 보인다. 긴은 열아홉 살에 순결을 잃고 게이샤가 되었다. 쉰여섯이 되도록 혼자 살았지만 여자로서의 매력과 기품을 잃지 않기 위해 매사를 긴장하며 살아왔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철 늦은 국화>, '만국(1954)' 중에서

 

긴이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는 옛 남자는 군인 출신의 다베라는 사람으로 긴과는 아들뻘 되는 나이 차이지만 긴이 삼십 대 중반으로 보여 평범한 연상연하 커플쯤으로 보였을지도……. 다베로부터의 전화가 뜻밖이긴 했지만 긴은 다베에게 옛사랑의 추억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잡초 무성한 기와집 터에 서서, 그저 아아!’ 하고 한숨만 내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이나 주변 환경에 조그마한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조심스러운 표정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둘이서 차분히 몰두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여자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는 그런 추억을 잊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긴은 순조롭게 몸치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만사 빈틈은 없는지……. -<철 늦은 국화> 중에서-

 

하지만 옛사랑에 대한 설레임이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긴의 집을 방문한 다베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긴은 지금껏 마음에 두지 않았던 하녀의 젊음이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긴의 마음과 달리 다베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다베는 옛사랑에 대한 추억보다도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렇다고 긴의 정염이 예전처럼 불타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탓이었을까? 긴은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감을 느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난 두 사람의 심리적 갈등은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옛사랑은 옛사랑일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세월이 만든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

 

옛날 불타오르던 두 사람의 사랑이, 지금에 와서 보니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강하게 갈구했던 암컷과 수컷 정도의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떠도는 낙엽처럼 허무한 남녀 관계였을 뿐이다. 여기에 앉아 있는 자신과 다베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다. 긴의 가슴속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철 늦은 국화> 중에서-

 

긴의 풍요로운 생활에 기대려는 다베는 더 이상 과거의 불타오르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피곤한 방식으로 서로를 만나고 있고 어쩌면 서로를 거절하기 위해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사랑을 무기로 돈을 구걸하는 다베는 더 이상 긴에게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 없는 구질구질한 남자에 불과했다. 긴은 타오르는 화로에 그 동안 간직하고 있던 다베의 젊을 적 사진을 던져 넣고 만다.

 

정말 어떻게 변통이 안 될까? 가게를 담보로 잡혀도 안 되겠어?”

어머나, 또 돈 얘기시네! 그런 얘기는 제게 아무리 하셔도 소용 없어요. 저는 한 푼도 없어요. 그런요 부자도 모르고, 있을 것 같지도 않는 것이 돈 아니겠어요? 제가 당신에게 빌리고 싶을 정도예요…….”

그게 말이지, 일이 잘 되면 당신에게도 돈 많이 갖고 올 거야. 당신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잖아…….”

, 이제 됐거든요. 그런 알랑거리는 말 같은 건……돈 얘기는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철 늦은 국화> 중에서-

 

철 늦은 국화[晩菊]’은 쉰여섯의 여자 긴이다. 늦게 핀 꽃이지만 꽃은 꽃이다. 곧 시들지라도. 하지만 철 늦은 국화를 바라보는 상대는 긴의 바램과 달리 한창 때의 꽃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옛사랑에게 여전히 여자로 보이고 싶은 긴이 안쓰럽긴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48년으로 전쟁이 끝나고 불과 3년도 안된 시간이다. 전쟁으로 인해 변해버린 인간의 마음을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으로 대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 관계를 가능케 하는 사랑의 변심이기에 직접적이진 않지만 전쟁의 상흔이 오히려 더 깊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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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