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오 헨리O.Henry는 필명, 1862~1910, 미국)/1907년

 

망상 분열증으로 10년 동안 고통을 받아왔던 네팔의 한 기자가 예술치료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 재기해 화제다. 그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때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정말 그림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실제로 국내 한 의과대학에는 미술치료학과까지 개설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미술 활동을 통해 병의 치료 효과를 높이는 미술치료가 대체의학으로써 각광을 받고 있다. 미술치료는 소아 정신질환의 경우 직접적인 치료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약물치료와 심리프로그램을 병행해서 환자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해 치유를 돕는 보조 요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기적은 있다

 

미술치료가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분야는 소아정신과로 최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나 게임중독증, 성폭력 아동에게는 미술치료가 효과적이라는 임상결과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의료기술의 진보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과학과 의학 밖의 질병도 존재한다. 한편 현존하는 과학과 의학의 마지막 단계까지 적용하고도 포기한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 음식으로 치료했다는 환자도 있고, 자연으로 돌아가 치료했다는 환자도 있고, 종교적 믿음으로 치료했다는 환자도 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이처럼 기적을 경험한 환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 아가씨가 살아날 가망은 열에 하나밖에 안됩니다. 가능성이란 우선 살아야겠다는 정신력이죠. 장의사를 부르는 쪽으로 마음을 둔다면 아무리 좋은 처방도 소용이 없는데 저 아가씨는 낫지 않을 것으로 체념하고 있어요. 저 아가씨가 마음속으로 애착을 가질 만한 게 없겠습니까?" -<마지막 잎새> 중에서-

 

바로 살겠다는, 살 수 있다는 의지다. 실제 치료 과정에서도 의사들이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워싱턴 네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예술인 마을에 사는 존시는 11월 어느날 마을을 덮친 폐렴에 걸려 병석에 눕고 만다. 병마는 존시를 사정없이 습격했고 철제 침대에 누워 거의 꼼짝도 하지 않고 유리창 밖의 벽돌집만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그녀는 창문 너머 담쟁이덩굴에 붙은 잎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하루하루 그녀가 침대에 누워 하는 일이라곤 창밖을 내다보며 남아있는 담쟁이 잎을 세고 있다.

 

"점점 더 빨리 떨어지네. 사흘 전에는 백 개쯤 있었는데, 그것들을 다 세려니 머리가 아팠어. 하지만 이제는 참 쉽네. 아, 또 하나 떨어지는구나. 다섯 개 남았다. 잎 말이야. 저 담쟁이덩굴에 붙은 잎. 마지막 잎마저 떨어지고 나면 나도 가게 되는 거야.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겠지?" -<마지막 잎새> 중에서-

 

존시의 동료인 수와 의사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살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려 하지만 좀처럼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의사에 따르면 존시가 살아날 가능성은 열에 하나밖에 안되지만 그나마 살려는 의지가 없다면 의약의 힘마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한다. 다만 존시가 살려는 의지만 확실하다면 희망은 다섯에 하나로 높아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과연 존시는 살 수 있을까?

 

사람을 살린 늙은 예술 낙오자의 마지막 걸작

 

하지만 수와 의사의 바램과 달리 존시는 하루하루 쇠약해져만 가고 창문 너머 담쟁이 잎도 밤새 몰아친 바람으로 이제 마지막 한 잎마저 힘겹게 붙어있다. 또 하룻밤이 지나면 마지막으로 떨어진 담쟁이 잎과 함께 존시는 절망의 늪으로 빠질 것이고 어쩌면 마지막 담쟁이 잎과 함께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하지만 기적은 있었다. 북풍이 거세게 휘몰아친 다음날 아침 커튼을 올리고 바라본 창문 너머 벽에는 아직도 담쟁이 잎 하나가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존시는 금새 표정이 밝아졌고 그동안 수의 어떤 간호에도 아랑곳 하지 않던 그녀가 수프를 먹기 시작한다. 밤새 비바람에도 마지막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담쟁이 잎의 의지와 생명력이 고스란히 존시에게 전달된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저기에다 마지막 잎 하나를 남겨둬서, 내 생각이 잘못이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 같아. 이젠 알겠어. 죽기를 원하다는 건 일종의 죄악이야. 수, 나에게 수프를 조금 줄 수 있겠니? 우유에 포도주를 탄 것도, 우선 손거울을 보여줘. 그리고 베개를 높게 받쳐 줘. 일어나 앉아서 네가 요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 -<마지막 잎새> 중에서-

 

기적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또한 기적은 당사자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주위의 그것이 동반될 때만이 기적적으로 다가온다. 오 헨리 소설의 특징을 단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반전'이다. <마지막 잎새>도 마찬가지다. 밤새 몰아친 비바람에도 담쟁이 잎 하나가 꿋꿋이 살아남은 데는 어느 늙은 예술 낙오자의 희생이 있었다. 창문 너머에 있는 생명의 비밀은 존시와 수가 세들어 사는 집의 아래층에 사는 베어먼 노인이 그린 그림이었다. '마지막 잎새'는 예순이 넘도록 예술의 여신의 치맛자락을 한번도 붙잡지 못하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 상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최근 몇 해 동안 상업용이나 광고용 엉터리 그림밖에는 아무것도 그린 게 없는 베어먼 노인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베어먼 노인도 폐렴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수를 통해 존시의 상황을 들었던 베어먼 노인은 존시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었고, 밤새 비바람 속에서 벽에 싱싱하게 붙어있는 담쟁이 잎을 그려놓았던 것이다. 이 일로 베어먼 노인의 폐렴 증세는 더욱 악화됐고 '마지막 잎새'라는 마지막 걸작을 남겨놓고 숨을 거둔 것이다.

 

"그렇게 비바람이 사나웠던 밤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아무도 몰랐대. 그런데 아직도 불이 켜 있는 랜턴, 헛간에서 끌어온 사닥다리, 화필 두세 자루, 그리고 초록색과 노랑 물감을 녹인 팔레트가 방 안에 흩어져 있더라는 거야. 창밖을 봐. 저기 벽에 붙은 담쟁이의 마지막 한 잎을, 바람이 부는데도 꼼짝도 안 하잖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니? 존시! 저게 바로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이야. 마지막 잎이 떨어진 그날 밤, 할아버지가 벽에다 그렸던 거야." -<마지막 잎새> 중에서-

 

희망이 있는 곳에만 기적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문득 집 앞 버스 정류장에 걸려있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매일 의미없이 읽으며 지나치곤 했는데 새삼스레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이 바로 희망이 간절한 시대여서가 아닐까?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사진:구글 검색>

Posted by 여강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