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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배호, 꽃다지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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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그 악사의 연애사>/2012

 

노래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기뻐서 부르고 또 눈물 속에 노래를 담기도 한다. 노래에 염원을 담기도 하고 원망도 노래로 풀어낸다. 내 인생을 노래에 담기도 하고 누군가의 노래에 내 삶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노래로 사랑의 진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노래의 달콤함에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노래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노래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여기 세 여자에게도 노래는 우여곡절 많은 삶의 자화상이자 중력의 무게를 부력으로 상쇄시키는 물같은 존재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의 야간업소에서 일했던 그녀들의 삶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었길래 저마다의 애창곡을 갖게 되었을까.

어차피 세상은 천국 아니면 지옥?

어두운 사막의 하이웨이. 차가운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쳐요.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여요. 여기는 천국 아니면 지옥일 거야. 호텔 캘리포니아에 온 것을 환영해요. 이곳엔 방이 많아요.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어요.

야간업소에서 일하는 그녀가 심수봉도 김수희도 아니고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라니 하고 폄하할 노릇은 아닌 것 같다. 노래를 좋아하는 데도 귀천이 있고 빈부가 있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초등학생 아들까지 둔 그녀가 이 외딴섬까지 그것도 육체를 판 댓가로 돈을 버는 야간업소까지 흘러들어온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듯 하다.

미혼모였건 이혼녀였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건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었을 것이다. 마치 어두운 사막의 하이웨이를 달리는 것처럼. 그녀에게 세상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녀는 영업이 끝나면 악사에게 부탁해서 기본형이 Bm A#으로 진행되는 '호텔 캘리포니아'를 들으며 좀 알아먹을 수 있는 부분은 입으로 흥얼거리기도 했고 휴대폰으로 통화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악사와 함께 캘리포니아 호텔 대신 낙원장 203호 갔으나 사랑은 할 수 없었다. 아들과의 약속 때문에. 그녀의 캘리포니아 호텔은 아들과 함께 온전한 가정을 꾸리는 아주 소박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저 멀리 희미한 불빛으로 보이는 호텔 캘리포니아를 위해 야간업소를 전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갈증과 원망에 의해 촉발된 염증

사랑이라면 하지말것을 처음 그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깊은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빰에 흘러 내릴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깊은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빰에 흘러 내릴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술만 취하면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배호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을 멋드러지게 부르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배호의 노래가 아닌 배호의 창법이었다. 목이 타서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창법. 이것을 수음(水音)이란다. 1960년대 배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도 당시 국민들이 뭔가에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게다.

그녀는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배호 이미테이션 가수였던 애인이 그녀를 이곳 섬마을 야간업소에 팔아넘겼던 모양이다. 버림받은 그녀에게 사랑의 갈증은 원망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혼란 그 자체다. 

연애란 갈증과 원망에 의해 촉발된 염증이 같은 부위에서 계속 재발하는 소모성질환 같은 거였다. 그런 게 없는 관계를 우정이라고 따로 부르면 된다. -<그 악사의 연애사> 중에서-

좌절한 투사의 꿈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 위에 핀 꽃다지. 나 오늘밤 캄캄한 창살 아래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장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 길 꽃다지.

야간업소에서 일하면서 손님과의 외박은 거부해 온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꽃다지'였다. 운동권 출신이다. 대학생 오빠가 시국사건으로 죽었다. 위장취업 온 대학생에게 배신당했다. 갖가지 추측이 무성했지만 파출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국사건으로 도망쳐온 것 같다. 여전히 그녀는 변혁을 꿈꾸는 좌절한 투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 여자의 애창곡은 버림받은 세상으로의 복귀를 향한 절절한 희망의 찬가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노래방의 등장과 번성으로 일을 잃어버린 야간업소 건반주자, 일명 마스터였던 악사의 연애사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난에 손을 들고 만 악사도 외해 가두리 양식장에 다이버로 취직했지만 어느날 수심 25미터 물 속에서 산소 부족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길을 떠나고 만다.

한창훈의 소설 <그 악사의 연애사>는 세 여자와 주인공 악사의 비극적 결말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세상은 보다 화려해지고 자유와 활력이 얼핏 만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는 달리 좀 더 교묘하고 영악해진 억압과 통제로 산소가 희박해지고 있는데도 정신을 잃을 때까지 미처 숨통이 조여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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